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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경 emb Apr 19. 2023

불협화음으로 젊음을 빌릴 수 있다면야

창고-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장을 살께



인천공항에서 만난 S의 캐리어는 벌써 15kg이 훌쩍 넘었다.


평균 기온 37도를 웃도는 태국, 그것도 모든 어매니티가 갖춰진 5성급 호텔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돌아올 땐 저가 항공을 타야 하니 짐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또 한번 잔소리를 퍼부을까 고민할 때쯤, 목베게를 두르고 담요까지 챙긴 S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나 외국 여행 하는 거 10년 만이야! 여권도 다시 만들었어!"



단언컨대 1961년생 S는 해외 여행을 못 다닐 정도로 돈이 없진 않았다. 서울에 작은 집 한 채와 국산 차 한 대가 있는 여느 평범한 가정. 자식 셋 대학까지 보냈으니 평균보단 조금 나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녀를 여태 가로막았던 건 무엇일까. 외동딸조차 기억을 못하는 홀어머니를 5년 넘게 부양해야 했던 일상일 수도 있겠다만 왠지 나는 S 앞에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선글라스와 여분의 안경 그리고 비행기에서 쓸 안대까지 꼼꼼히 점검하는 엄마에게 작은 의문을 가지게 된 채, 모녀는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0년 삶에서 엄마와 단둘이 떠나는 해외여행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무서웠는데 사실 우리는 상성이 극악으로 안 맞는 모녀이기 때문이다.



독립하기 전 나는 일주일 중 적어도 닷새는 엄마와 싸워댔다.


방송작가 출신 글쟁이 엄마와 10대 때부터 글쓰기와 토론이 장기였던 현역 기자 딸내미의 말싸움 수위는 단언컨대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한다.

온갖 가시 돋친 말이 오가다 보면 아빠와 동생들은 벌벌 떨다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심판 없는 링에서 때로는 육탄전까지 벌어졌고, 결국 한 명이 엉엉 울어야 그 난리통은 끝났다.


주말마다 밖에 나가고 싶어 하는 엄마는 주말마다 침대와 한 몸이 되는 딸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매일 가계부를 쓰는 엄마는 잔고가 곧 가계부요 하는 딸의 소비 성향에 기겁을 하기도 했다.

ESTJ인 엄마는 '엄격한 관리자'의 표본이었고 INFP 딸내미의 소심한 반항들을 절대로 봐주는 일이 없었다. 18살때 홧김에 가출했더니 맞불로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꿔버린 일화는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다.





그런 엄마와 함께 한 5일 동안의 방콕 여행은 역시나 우당탕탕 불협화음의 대잔치였다.


엄마는 호텔 조식의 시작을 끊어야 한다며 새벽 5시 반쯤 천생 야행성인 나를 매일같이 흔들어 깨웠다.

반대로 나와 방콕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오후 6시쯤부터 엄마는 어김없이 호텔에 갈 시간이라고 말했다.

아침 조식에 나온 각종 과일로 배를 채운 엄마는 거리의 천국 태국 음식들을 가볍게 건너뛰었다.

태국 로컬 음식이라면 하루 다섯 그릇도 먹어치울 수 있는 나는 애써 찾아 마크를 찍어둔 구글 맵의 식당들을 눈물과 함께 지워야 했다.

카오산로드 옆 잔잔한 라이브카페에서 엄마와 맥주 한 잔을 곁들이거나 루프탑 바에서 방콕의 화려한 밤을 내려다보려는 스케줄 역시 하나둘씩 격파당했다.

호텔 사우나와 로비, 수영장과 조식을 가장 좋아하는 엄마를 옆에서 보며 "보라카이나 괌을 갔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열 번쯤은 한 것 같다.



한편으로는 조금 슬프기도 했는데, 엄마의 기세가 한 줌쯤은 사라졌다는 게 드문드문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생 때쯤 간 가족여행에서 갑자기 "나에게 시간을 줘!"라고 외치더니 하루종일 혼자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이젠 방콕에서 영어로 누가 말을 걸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여행 기간 엄마는 아침 화장을 할 때마다 눈가의 주름을 거듭거듭 쓸며 조금이라도 펴보려는 시도를 하곤 했다.

한 캔을 가볍게 비우던 맥주는 세 모금 정도만 마시면 바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좋아하던 사우나조차 5분 정도만 들어가 있으면 숨이 차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온 '세월'이란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다.


여행 사흘쯤 됐을 때 방콕 왕궁을 둘러보며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사진을 부탁했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휴대폰을 맡긴 뒤 엄마 옆에 섰는데 갑자기 엄마가 참 작게 느껴졌다.

조용히 엄마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시원한 한국에서조차 스킨십을 질겁하던 엄마는 웬일로 나를 함께 끌어안았다. 





한국행 비행기는 자정쯤 출발했다. 덕분에 우리는 여행 마지막날에도 방콕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어느 쇼핑몰의 푸드코트에서 팟타이와 돼지고기 바질볶음, 족발덮밥을 먹다가 엄마는 말했다.



"사실 너가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난 여긴 안 왔을 것 같아. 너가 방콕을 가자고 했을 때 유튜브로 좀 찾아보긴 했어. 그런데 약간 도시, 음식, 젊음, 이런 느낌이더라고.

그런데 난 이제 그런 게 무섭더라. 생각해보니까 내가 안 젊어서 그런 것 같아.

알겠지만 엄마, 젋을 때 재밌게 살았잖아. 직장에서도 잘 나갔고 승진도 제일 빨리 해서 메인 작가 타이틀도 달았고. 너 동생 태어나면서 그만두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인생의 전성기었던 것 같아.

그런데 엄마는 이젠 그 젋었을 때로 돌아갈 수 없잖아? 이렇게 늙은 내가 이런 젊고 활기찬 도시에 여행을 오는게 별로 즐거울 것 같지 않았어.

그래도 막상 와보니 그것도 편견이더라. 좋긴 정말 좋네. 너가 다 찾아주고 해주니까 더 편한 것도 있지만... 딸 키웠더니 30년 만에 이런 호강도 다 해보고 말야. 이번에 정말 고생 많이 했다."



그러니까 젊음으로 갈 수 없는 내 엄마는 젊음의 활기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해외여행을 두려워했던 거다.

아직 젊은 나는 그 감정을 차마 전부 이해하지 못 했지만, 엄마가 왜 10년 동안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쉽게 인천공항으로 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클리셰지만 스쿠버다이빙을 취미로 삼아 일 년에 꼭 한 번은 해외로 나가던 나의 과거를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조금 위안삼고 싶은 점이라면 지금이라도 나의 엄마를 이 도시로 데려올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직은 엄마도 젊다고, 이런 도시를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지만 태생이 살갑지 못한 나는 차마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 여기 젊은 사람들도 다이어트 한다고 쏨땀을 그렇게 많이 먹는대. 엄마도 그거 한 접시 더 먹고 갈래요?" 라는 이상한 말을 덧붙이며 자리에서 슬쩍 일어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아침 8시였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나와 달리 엄마는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엄마는 저가 비행기를 처음 타봐서, 좌석 간 거리부터 물 한 병 주지 않는 서비스까지 모든 게 너무 낯설었다고 했다.


평일 이른 아침이라 아빠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오긴 어려웠다. 본가와 내 집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 티켓을 각각 한장씩 끊은 뒤 엄마와 함께 쌀쌀한 공항의 아침 공기를 마셨다. 


일주일동안 5성급 호텔에 묵으며 밥도 청소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엄마의 눈주름이 미세하게 펴지지 않았을까 기대해하며 슬쩍 옆을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드라마나 소설과는 달라 평온한 일주일은 드라마틱한 리프팅 효과를 선물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아직 엄마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고, 버스에 오르는 엄마의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이 정도면 젊음을 잠시 대여할 정도의 힐링은 된 것 아닐까.


갑자기 이번 휴가를 가치 있게 썼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7일 내내 이어지던 우당탕탕 불협화음을 호로록 잊어버린 나는 그래서 씩 웃으며, 손을 흔들어 엄마를 배웅했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괜찮은 일주일이었다.






"변함없는 나의 삶이 지겹다고 느껴질 때

자꾸 헛돌고만 있다고 느껴질 때

지난 날 잡지 못했던 기회들이 나를 괴롭힐 때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장을 살께


언젠가 함께 찾았었던 그 바다를 바라볼 때

기쁨이 우리의 친한 친구였을 때

우릴 취하게 하던 그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강릉으로 가는 차표 한 장을 살께


나는 그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조차 없어

그저 수첩속에 그 차표들을 모을 뿐

어느 늦은 밤 허름한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 속에 숨은 바다를 찾아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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