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말보다 글이 좋았는데

글씨는 소리가 없어서.

by 세하

나는 나의 인생이 담긴 브런지북 한 권 써내기를 완성했다.

제목부터 고단했던 '죽어라 죽어라 하더라.'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쏟아내면 좀 나아지려나?


그래서 그랬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깊숙한 한마디는 끝내 못한 것 같아서.


한동안 괜찮았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내가 써 내려간 이야기는

이따금 생생한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건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왜 그렇게 선명하고 디테일한지

나는 늘 그때 그 자리에 서있었다.


단어하나, 몸짓하나 마저도 팔딱거리며 살아있었다.


그건 기억이 아닌, 오늘이었다.


매일 꿈을 꿨다.

365일 중 하루도 빠짐없이 꾸어왔던 꿈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을 때도 있었고,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타임머신과도 같았다.


나는 억어지로 밀어 넣어진 그 기억 속 깊은 바다에서 허덕거렸고 샤워를 할 때면 물보다 조금 낮은 온도의 눈물로 삼켜냈던 울분을 토해냈다.


나는 그때마다 괜찮다는 말로 나 자신을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괜찮은 거야..'


나는 그런 내 기분과 상태를 누구에게도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날아다니는 칼날 같은 소리들이 싫어서

싸움이 날때도 도통 큰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나라도 입을 다물어야 조금은 고요해지니까.

그래서 나는 늘 침묵을 선택하거나 침착함을 선택했다.

나는 내 감정조절에 탁월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도로 위의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음식집안의 옆 테이블 소음.

때로는 매장에서 매일 들어야 하는 드라이기 소리에도 소름이 끼쳤다.

내 귀는 언제부터 이렇게 고요를 좋아했을까...

나이트클럽은 도대체 어떻게 다녔을까?

또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태블릿 속 몇백 개의 질문에 답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답을 하는 순간마저 짜증이 치밀었다.


'무슨 질문이 이렇게 많아?.'

눈앞에 글씨들이 희뿌옇게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눈앞이 흐려지는 일들이 빈번해졌다.

10살쯤 약시라는 진단을 받은 기억이 있다.

엄마는 보안경을 맞춰줬지만 안경 낀 외모가 싫었던

철부지 어린이는 며칠을 못 버티고 안경을 벗어던졌다.

그 후로 나는 원시에 난시라는 것만 자각한 채 살아왔고,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안경점을 찾았다.

10분 넘게 기계에 턱을 괴고 초점을 맞추어보았지만 교정시력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나이에 병원을 찾았다.

교정시력이 나오지 않는 약시라는 진단은

수술도 그 어떤 방법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떨어지는 시력을 지켜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책 한 권을 집중해서 읽어내는 게 힘들어

모바일 책으로 글씨를 크게 봐야 했고,

남편에게 저기 뭐라고 쓰여있어?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기 시작했다.


나는 태블릿의 질문지에 그렇다. 아주 그렇다를 체크할 때까지만 해도 이 모든 것이 어릴 때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약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모든 핑계는 그렇게 과거로 돌아갔다.


-과거를 후회하는 일이 많습니까?

-조금 그렇지 않다. (v)


나는 지금 생각이 났다.

나는 나를 얼마나 모르는 걸까?

어디까지가 나일까.

어디부터가 내가 모르는 나인 것일까.

이전 01화1.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