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감은 불안감으로 부터
2 진료실의 문을 열자마자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처음 마주한 의사 선생님의 헤어스타일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기에 충분히 우스꽝스러웠다.
미용실을 바꾸시는 게 어때요?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켜내고 자리에 앉았다.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의사의 표정에 한결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상상했던 그의 표정은 딱딱했어야 마땅했지만
미소 사이로 보일 듯 말듯한 하얀 치아가 마치 나를 반기는 빛처럼 보였다.
의자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찰나 의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게 힘드셔서 오셨나요?"
"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채로 눈에서는 방금 뚫린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콸콸 흐르기 시작했다.
그건 흐느낌이 아니라 광광에 가까운 눈물 폭포였다.
3분쯤 그렇게 울었을까?
나는 다시 대답했다.
"이래서요..."
"보통 많이 그렇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오네요.
왜 눈물이 나오는지도 모르면서 눈물이 나오고
기분이 축 가라앉아요.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세상에 먼지가 되어 떠다니고 싶은 마음이에요.
그런데 또 매일 그런 건 아니라서...."
의사는 내가 적어낸 답변에 대한 답을 해줬다.
"극도로 우울증이 심한 상태라고 보입니다.
이 우울감은 불안감으로 오는 것 같은데
자존감이 너무 강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 힘드신 걸 수도 있겠네요.
보통은 우울감이 오면 자존감도 떨어지기 마련인데,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내가 자존감이 높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니까.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는 건 내가 다치지 않는 방법만을 선택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던 게 맞는 것일까..
의사의 말을 들으면서도 집중하지 못했다.
또다시 나만의 생각안에서 질문하고 답했다.
의사는 내 머릿속을 읽어낸 듯 다시 질문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세 가지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힘드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힘듦 세 가지를 고백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묵혀있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건 강한 긍정의 눈빛으로 듣고만 있어 주던 의사의 표정 덕분인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며칠 전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 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블랙아웃.
지인들과의 술자리는 2차로 우리 집이 되었다.
얼마나 먹었는지도 모를 만큼 퍼부었고, 나는 어김없이 블랙아웃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캠핑장 예약이 되어있어 일찍 일어나 서두르려는데 남편이 먼저 일어나 있었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그들은 언제 돌아간 거지?'
핸드폰을 보고 있던 남편의 표정은 보통때와는 많이 달랐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곤 이내 세면대 앞에서 손가락에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
기억해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붕대를 풀러 보니 오른쪽 새끼손가락과 손바닥에 깊고 길게 베인 상처가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불안한 마음은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을 뒤엉켰다.
나는 평소보다 더 길게 세수를 마친 뒤 심호흡을 하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손가락 왜 이래?"
한 번도 보지 못한 차가운 표정.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 사이로 얼음장 같은 동공이 끝내 내 얼굴을 외면했다.
"대답을 해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사과라도 하지?"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건 답답함이었는지 억울함이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편의 목소리가 덩달아 커졌다.
"기억할 수 있다며?, 네 말에 책임을 지겠다며?. 우린 어제 이혼했어."
심장이 발끝으로 뚝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그냥 말을 해주면 안 돼? 미안하지만 난 기억이 전혀 안 나.."
내 목소리는 직전과는 다르게 많이 작아지고 있었다.
침착함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억해 내야 하는 머릿속에 울려 퍼진 남편의 음성.
"너 어제 미친 사람 같았어.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인 줄 10년을 넘게 모르고 살았어. 그게 진짜 너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 목소리는 더 기어들어갔다.
"내가 어쨌는데.. 내 손가락은 왜 이렇게 된 건데.."
생각해 보니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왼쪽 턱이 말을 할 때마다 뻐근했다.
"설마 우리 몸싸움이라도 한 거야?"
나는 불현듯 나의 몸에서 오는 통증에 민감해졌고, 쏘아붙이듯 물었다.
"너 그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사진도 찍어놨고."
남편이 건넨 휴대폰 사진첩엔 피 묻은 휴지와 시체처럼 누워있는 내가 보였다.
"그래서? 이게 뭔지 설명을 해줘야 알지."
그제야 남편은 간밤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만취가 된 그들이 돌아간 뒤 난대 없이 내가 남편을 앉혀놓고 남편에 대한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취한 나를 침대에 눕혀놓고 설거지를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하겠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남편이 계속 눕히려고 나를 뒤로 밀어내자 설거지통에 있던 그릇하나를 집어던졌다고 했다.
그리곤 깨진 유리조각을 손에 들고 남편 목에 그 조각을 가져댔다고 했다.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니 표정이 아직도 생생해. 말로만 듣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한테 죽임을 당하는 일이 나한테도 벌 어질 수 있구나 생각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이혼하자고 했어. 나랑 도저히 못살겠다고. 이제 됐어?"
"말도 안 돼. 그럼 내가 왜 누워있는데."
나는 혼자 그렇게 난동을 부리더니 서있던 채로 바로 쿵하고 쓰러져서 주방 바닥에서 잠들었었다고 했다.
그리곤 유리조각에 손이 다친 내 손가락에 붕대를 감으며 너무 괴로웠다고도 말했다.
"네가 다음날 분명 내가 때린 게 아니냐며, 내가 다치게 한 것 아니냐며 난리 칠까 봐 사진도 찍어 논거야.
취중진담이라잖아? 난 어제 너의 진심을 봤어."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내 깊은 곳엔 정말 뭐가 있는 것일까?
"선생님, 저는 왜 그랬던 걸까요? 왜 그러는 걸까요? 제가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게 너무 고통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