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

인공눈물이 마른자리엔 4화

by 노리스 부인

딸랑


“반갑습니다. CS 24… 어? 민규구나.”


정휘가 나가자마자 다시 문이 열리며 푸른색 제복에 형광 조끼를 착용한 젊은 경찰이 웃으며 들어온다. 얼마 전부터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박민규다.


“지수, 안녕 안녕, 나 커피 한 잔만 내려줄래.”



지수가 민규를 알게 된 건 한 달 전이었다.

어느 날 동네를 순찰 중이던 순경 민규가 편의점에 들어와 커피를 사며 지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노량진에서 공부하시지 않으셨어요?”


경찰 공무원 준비를 위해 노량진에서 2년간 공부했던 민규는 낯익은 얼굴인 지수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지수는 필기 한 번 붙어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공무원 수험생 시절을 끄집어 내려는 민규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민규의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집요한 질문 끝에, 지수는 자기가 민규와 같은 독서실과 같은 고시 식당을 이용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 정말, 제 눈은 틀림없다니까요. 지수 씨를 처음 본 순간 어디선가 봤다 했는데…, 이런 인연일 줄이야. 그 합격 독서실만 해도 그래요. 제가 3층이었고, 제 기억에는 지수 씨는 아마 4층에 있으셨던 것 같은데, 제가 눈썰미 하나는 정말 좋거든요. 휴게실에서 지수 씨를 봤다는 기억이 지수 씨를 본 순간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참 그 골든벨 고시식당도 기억나시죠? 월요일에 소고기, 수요일엔 돼지고기, 금요일엔 닭고기가 나오는 그 식당 말이에요. 참 그 식당에서 전 아침마다 라면을 끓여 먹곤 했어요. 지수 씨는 아침에 그냥 토스트를 만들어 드시는 것 같던데, 맞나요?”


지수는 민규의 수다스러운 반가움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같은 노량진에서 공부했지만 지금 자신과 민규의 처지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기 때문이다.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민규는 순경이 되어 당당하게 제복을 입고 순찰을 도는 반면, 시험에 떨어진 자신은 야간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민규를 보고 있자니 고작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에 합격했을 때 기뻐 환호성을 지른 자신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그런 탓에 민규를 볼 때마다 무덤덤하게 손님으로 대하려 했지만, 이틀 걸러 한 번씩 들러 너스레를 떠는 민규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든 지수다.


"그러니까, 이게 인연인 거예요. 제가 원래 커피는 아메리카노만 마시는데, 그전에는 저기 놀이터 앞 편의점에서 먹다가 갑자기 여기 CS24 편의점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뭐예요. 아 물론 경찰서 김 경장님이 거기 커피가 맛없다고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요. 아참, 그러고 보니 여기도 커피가 그리 싸지는 않네요. 아메리카노 한 잔이 1,500이라니, 저기 편의점은 한 잔에 천 원 하는 곳도 있거든요. 참 지수 씨 보니 노량진 자동판매기 커피도 생각나네요. 아마 한 잔에 5백 원이었었던 것 같은데..."


볼 때마다 들어와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민규의 말을 들어주다 보니, 어느새 친구로 지내게 된 지수와 민규다. 또 매일 보다 보니, 요즘 들어서는 새벽 순찰길에 들러 쏟아내는 민규의 수다를 듣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 건지 궁금한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지수가 건넨 커피를 마시던 민규가 방금 나간 정휘에 대해 묻는다.


“근데 방금 나갔던 정장 입은 남자, 여기 자주 오는 사람이야?”


민규가 정휘에게 관심을 보이자 지수도 궁금증이 일어난다.


“그냥 두 번 정도 온 손님인데, 왜 아는 사람이야?”


민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건 아닌데, 꼭 어디서 본 사람인 거 같아서 그래. 누굴까? 기억이 날듯 말 듯 하네.”

“왜? 저 사람도 노량진에서 본 거 아냐?”


지수의 비꼬는듯한 질문에 민규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야, 내가 경찰이 되고 나서 본 것 같으니, 그리 좋은 곳에서 본 건 아닐 거야.”


오래간만에 보는 민규의 심각한 표정에 지수가 처음 정휘를 만났을 때 피를 흘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


추운 겨울날, 굳은 표정의 정휘가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덩치 큰 남자들의 표정도 겨울 날씨처럼 차갑게 굳어있다. 행복동 먹자골목 뒤편의 한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받아 든다. 앞에는 기름으로 발라 넘긴 머리에 갈색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가 늑대같이 교활한 웃음을 짓고 앉아있다. 남자 뒤에는 어리게 보이지만 우락부락한 표정의 덩치 큰 남자 둘이 서 있다.

주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정말 처음 두 달은 이자 안 받는 거 맞죠?”


남자가 누런 이가 다 보이도록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정말 그런다니까, 그러니 내가 준 돈으로 빨리 골드금융 돈은 싹 다 갚아버리고 우리 스마일하고 거래하면 된다니까.”


주인이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찍으려 한다.


“덜컹”


식당 문이 열리고 정휘가 부하들과 같이 들어온다. 정휘가 매서운 눈으로 그 남자를 쏘아본다.


“너, 남의 구역에서 뭐 하는 거지?”


주인 앞에 앉은 남자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아, 장정휘 팀장, 오랜만이야.”


정휘가 남자의 얼굴을 노려본다.


“김천식, 너 남의 구역에서 뭐 하느냐고 묻잖아.”


천식이 일어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든다.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 김 사장님이 장 팀장네 돈 갚기가 힘들다고 해서, 내가 그냥 인생 상담이나 한번 해 본 거야.”


정휘가 주인이 들고 있는 서류를 빼앗듯이 낚아챈다. 정휘가 그 서류를 읽어본다.


“김 사장님, 정말 여기 스마일 금융한테 빌린 돈으로 우리 골드금융 빚을 갚으려고 했습니까?”


당황한 김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실 요즘 장사가 너무 안돼 돈 갚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러네. 그런데 스마일 금융에서는 똑같은 돈이지만 두 달을 공짜로 봐준다고 해서…”


정휘가 얼굴을 찌푸린다.


“사장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거 안 보셨습니까!”

“거기 뭐라고 쓰여 있는데?”


정휘가 한숨을 쉰다.


“초기에 받지 않은 원금과 이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특별 금리를 적용해서 내야 한다.라는 조항 말입니다.”


천식의 얼굴이 벌게진다. 정휘가 그 서류를 들어 천식의 앞에서 찢어 구긴 다음 바닥으로 던져버린다. 천식이 주먹 쥔 손이 떨려온다.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앞으로 나오자 정휘 뒤의 수하들도 앞으로 나온다. 천식이 손을 들어 제지한다.

정휘가 바닥에 뒹구는 서류를 구둣발로 짓밟는다.


“김천식 너, 가서 임경식 사장한테 전해. 니들이 비열하게 장사하는 건, 내가 알바 아니지만, 남의 구역 기웃거리는 건 당장 그만두라고.”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오려 하자, 천식이 다시 손을 들어 제지시킨다. 천식이 뒤의 수하들을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온다. 식당 문이 닫히자 뒤를 따라오던 건장한 남자가 천식에게 투덜거린다.


“형님 차라리 저놈들이랑 한판 붙지 그랬습니까. 우리들도 자신 있는데 말입니다.”


천식이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때가 아냐. 그리고 정휘 그놈 잡으려면 지금 우리 셋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그놈이 어리지만 얼마나 잔인한 놈인데.”


천식이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는 듯 ‘카악’하고 길가에 침을 뱉는다.


천식이 나간 뒤, 정휘가 김 사장과 마주보고 앉는다.


“제가 이번 달 이자는 다음 달까지 연장해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까지 하시면 어떡합니까?”


정휘의 말에 김 사장이 한숨을 쉰다.


“장 팀장이 우리 생각해 주는 거, 누가 몰라서 그러나. 근데 정말 막막한 거야. 장사는 되지도 않지. 아들놈 중학교 가는데 옷 한 벌, 가방 하나도 새 걸로 사주지 못하니, 아비로서 너무 면목이 없어서 그러네.”


정휘가 가게 안에 딸린 방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김 사장의 아들과 눈이 마주친다.


“그래도 스마일 금융이랑은 거래하시면 안 됩니다. 거긴 사채업자 중에서도 정말 최악인 곳입니다.”


정휘가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다 김 사장을 본다.


“이번 달은 제가 한 번 정도 원금만 받도록 해보겠습니다.”


김 사장이 눈물을 훔친다.


“고맙네, 고마워, 장 팀장 정말 고마워.”


밖으로 나온 정휘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옆에 있는 승환에게 준다.


"이거, 김 사장님 이번 달 이자니까. 회사에 입금해.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고."

"형님, 이렇게 자꾸 사람들 이자를 내주시면 어떻게 하시려고."


정휘가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한다.


"사채라는 것도 다 사람 사이에 하는 일이다. 너무 세게 하면 부러지게 마련이야. 춥다. 사무실로 가자."


*


행복동 뒷골목의 허름한 상가 사무실, 조그만 글씨로 ‘골드금융’이란 상호가 적혀있다. 갈색 소파에 푸근한 인상의 한 남자가 앉아있다. 골드금융 사장 김한수다. 정휘의 이야기를 들은 한수가 궁금한 듯 묻는다.


“아니 스마일 금융 얘들이 왜 여기 행복동까지 와서 영업하려 하지?”

“임경식 사장이 이자를 너무 많이 뜯어내더군요. 그쪽 구역에선 이미 스마일 금융 돈을 빌리면 패가망신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더 이상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정휘의 설명을 들은 한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겠다. 오늘 일은 잘 처리했어.”


잠시 생각에 잠긴 한수가 정휘를 본다.


“정휘야, 내가 이 바닥에서 30년간 일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우리같은 사채업자 한테는 참 지키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사람들에게 너무 독하게는 하지 마라. 언젠가는 꼭 탈이 나기 마련이거든.”


정휘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수가 소파 옆에 놓아둔 쇼핑백을 끌어당긴다.


“이번 달도 실적이 좋네, 정휘 네가 맡고서부터 내가 사채 쪽에는 신경 안 써도 되니 참 좋더라고.”


정휘가 한수에게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한수가 쇼핑백에서 오만 원권 뭉치 하나를 꺼내 정휘에게 내민다. 정휘가 돈을 받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한수가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근데 정휘, 너는 젊은 놈이 무슨 돈이 그렇게 필요하냐? 지금 사채 일로 버는 걸로도 수입이 꽤 될 텐데…, 요즘은 밤에 근처 유흥업소도 봐주고 다닌다면서…”


정휘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동생이랑 둘이 살다 보니 아직 집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수가 일어서며 정휘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래 알지만, 어디서 말 안 나오게 해라.”


한수가 일어나자 옆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은색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일어나 비굴한 웃음을 짓는다.


“사장님은 맨날 정휘만 챙겨주시고…, 헤헤, 저도 용돈 좀 주십시오.”


한수가 얼굴을 찌푸린다.


“원일이 넌 정신 좀 차려라.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일은 정휘에게 다 맡겨놓고 맨날 술이나 먹기 바쁘고, 사실 오늘 일도…, 원일이 네가 처리해야 할 일 아냐?”


한수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간다. 한수가 나간 문을 노려보던 원일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원일이 테이블 위의 지폐를 구겨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투덜거린다.


“아, 몇 푼 주지도 않으면서, 꼰대 새끼가 말 더럽게 많네. 야, 정휘 너는 사장님이 총애하고 용돈도 많이 받아 좋겠다.”


정휘가 원일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항상 정휘 곁을 지키는 승환이 따라 나오며 말을 붙인다.


“형님, 원일이 형님 조심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형님 없는 데서 자꾸 형님 욕을 하는 거 같더라고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정휘가 승환의 얼굴을 쳐다본다.


“알고 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아마 사장님도 원일이 형이 옛 친구의 동생이니까 어쩔 수 없어 그냥 놔두시는 거야.”


승환이 불만 섞인 표정을 지으며 정휘에게 묻는다.


“근데 형님, 앞으로도 이자 못 내는 사람들 또 형님이 대신 내주려는 건 아니죠? 형님이 밤에 업소 봐주고 받은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 이자 내주는 거 한두 번이 아닌 거, 알고 있습니다.”


정휘가 승환을 노려본다.


“승환이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라.”


정휘가 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승환에게 건넨다.


“오늘은 일찍 집에 들어가라. 술 먹지 말고. 그리고 월급날이니까 부모님께 뭐 좀 사 들고 가고.”


승환이 정휘가 내민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다.


“그럼 형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십니까? 평소에는 매일 새벽 두 시가 넘어 들어가시잖아요. 동생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승환의 입에서 동생 소리가 나자 정휘가 작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나도 오늘은 한번 일찍 들어가 보려고.”


승환을 보낸 정휘가 아까 사건이 벌어졌던 식당으로 다시 간다. 영업시간이 아니라 그런지 불 꺼진 식당에 김 사장은 없고 아이 혼자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이가 정휘를 보고 말한다.


“지금 영업 안 하는데요.”


정휘가 체구가 작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번에 중학교 올라가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정휘가 지갑에서 오만 원권 열 장을 꺼내 손에 쥐어준다.


“새 옷이랑 가방 하나 사라. 아빠한테는 그냥 네가 그동안 모은 돈이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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