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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행동하는가?

말만 하고 막상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서

by 세이지SEIJI

"나도 변하고 싶다", "이제는 해야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본다. 나 역시 그런 말을 수없이 해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말과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행동은 단지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 '감정의 임계점'에서 터지기 때문이다.




두 가지 행동 부스터

인간이 행동하는 이유는 단 두 가지뿐이라는 가설을 세워본다. 즐거움이 극에 달했거나, 괴로움이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졌거나.

즉, 우리가 진짜로 행동하게 되는 순간은 즐거움의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나 괴로움의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뿐이다.




영어라는 영원한 숙제

예를 들어보자. 많은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인생 숙제 같은 것이다. 영어를 잘하면 좋다는 건 알기에 새해 계획에도 꼭 포함시키는 단골 메뉴지만, 정작 실천은 잘 안 된다.

왜냐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못한다고 크게 불편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괴로움의 임계점'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란 의미다. 그렇다고 즐거움의 임계점에 다다르기에는 그 여정이 멀게만 느껴진다.

영어를 배워나가는 과정은 계속 해 나가기에 충분히 즐겁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고, 영어를 유창하게 됐을 때 얻게 될 즐거움은 너무 멀리 있어서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속에서 영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 상태는 '즐거움'도 '괴로움'도 임계점을 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상 움직이지 않는다.



쾌락원칙과 그 한계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이 '쾌락원칙'에 따라 작동한다고 봤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쾌락만 좇는 건 오히려 불행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벤담,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현대 심리학도 계속해서 이야기해왔다.

쾌락만 좇는 건 필연적으로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되어있다. 바로 중독이 그런 것이다. 즐거움의 임계점에 다다른 어떤 쾌락을 맛본 뒤 우리는 곧바로 '쾌락의 상실'이라는 고통을 겪는다. 결국, 쾌락을 계속 좇는 행위는 상실의 고통을 피하려는 또 다른 행동인 것이다.



커피와 나의 관계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커피 애호가다. 단순히 커피의 맛과 향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커피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정신적 위로와 겹쳐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날은 심적으로 힘들다.

그런데 나는 원래 위가 약하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릴 때가 많다. 커피가 여러모로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커피를 끊어보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건 아직까지는 커피로 인한 즐거움이 그로 인한 괴로움보다는 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커피로 인한 부작용이 커져 위통이 심해지거나 건강이 나빠 괴로움의 임계점에 다다른다면 나는 커피를 끊게 될 것이다.



영웅의 각성 순간

이쯤에서 익숙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은 언제 '각성'할까? 언제 큰 결심을 하고, 갑자기 자기 인생을 바꿀까?

배신을 당했을 때, 가족을 잃었을 때, 죽음의 문턱에 갔을 때. 즉, 더는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괴로움의 임계점을 넘었을 때'다.

이건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리 구조 그 자체다.



영웅의 여정과 우리의 삶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이러한 변화의 여정을 '영웅의 여정'이라 불렀다. 전 세계 수천 개의 신화를 분석해봤더니, 공통적인 패턴이 있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처음엔 일상에 안주하다가, 어느 날 사건을 통해 '부름'을 받는다. 거부하고 망설이다가, 결정적인 시련을 겪게 되고... 그 시련 속에서 결국 자신을 초월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그 결정적 시련이 곧 괴로움의 임계점에 다다른 순간인 것이다. 해리 포터나 마블 히어로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런 영웅의 구조는 사실 우리 모두의 삶에도 숨어 있다.



습관과 변화의 차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는 습관과 같은 행동들은 사실 대부분 즐거움과 연관이 있다. 즐거우니까 게임을 하고, 넷플릭스를 보고, 술을 마시고, 라면도 먹는다.

하지만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대부분의 순간은 괴로움과 연관이 있다.



포스트트라우마 성장 이론

심리학에 '포스트트라우마 성장'이라는 이론이 있다. 인간은 때때로 질병, 상실, 모욕, 트라우마 같은 극한의 사건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삶을 다시 보게 되고, 그 전에는 절대 가지 못했던 깊이로 자기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겪고 난 후, 더 단단해지고, 더 성숙해진 사람들은 괴로움의 임계점을 넘고, 변화와 성찰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암투병 끝에 이겨낸 사람들, 큰 사고를 겪은 사람들,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스토리들을 우리는 종종 접하지 않은가.



자책 대신 이해하기

우리는 스스로에게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충분히 즐거운가? 아니면 충분히 괴로운가?"

둘 중 어느 것도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머릿속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너무 자주, "내가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고 자책한다. 하지만 어쩌면, 의지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행동하게 될 만큼의 감정적인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일 수도 있다.

내가 행동으로 옮겨서 뿌듯했던 인생의 순간들도 곰곰히 떠올려보자. 정말 내 의지력이 강해서 했던 것인지, 아니면 안 하고는 못 배길만큼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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