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에 대한 조금은 다른 고찰
조금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바로, '존경은 게으름이다'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 정말 대단하다. 존경스러워."
처음엔 감탄으로 시작된다. 그 사람의 능력, 성취, 태도에 놀라고 매료된다. 거기까지는 자연스럽고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감탄이 일정 지점을 넘어서면, 그 사람의 판단과 가치관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데 있다. 의심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 상태. '그 분이 그랬다니까 맞겠지.'
그 순간, 우리는 판단을 위임해버린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존경은 사고를 멈추게 한다.
그럼, 왜 존경에 기대고 싶어할까? 답은 단순하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에 마주한다. 매 순간 판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건 피곤하고 고단한 일이다. 괴롭고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진다.
역사 속 인간은 늘 그런 선택을 해왔다. 벼락과 폭풍우가 무서워 신을 만들어 자연에 신격을 부여했듯이, 다시 특정 인물에게 기대어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 해왔다. 종교적 믿음이 그렇고, 주종관계의 복종이 그렇다.
존경은 그래서 편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저 사람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야." 판단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의 안전지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게으름의 끝장판이 사이비종교에 매달리게 되는 심리 같다. 어떻게 저런 사기꾼 같은 교주를 저리 믿고 따를 수 있을까라며 놀라워하지만, 사실 신봉자들의 믿음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의존하고 사고의 자유를 위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경은 겸손도 미덕도 아닌, 정신적 게으름이다.
또한, 존경은 대상을 단순화하고 납작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우리는 존경하는 대상도 나와 같이 인생을 오롯이 순간순간 살아내는 인간 중 하나란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좋아한다. 그의 염세주의, 고독, 삶은 고통이란 날카로운 철학적 통찰을 높게 산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잘 알려진 철학적 주장 넘어 '여성'에 대한 혐오가 상당했던 점은 잘 모른다. 그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리 순조롭지는 못했다. 그리고 평생 혼자 살았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에세이 '여성에 대하여'에서 "여성은 유치하고 천박하며 근시안적"이라고 주장했다. 출산을 '새로운 고통의 희생자를 만드는 일'로 보면서 여성을 더욱 부정적으로 여겼다. 말년에는 자신의 책을 좋아하는 여성 독자들을 직접 만나면서 이런 편견을 조금씩 수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여성혐오주의자였다.
즉, 그도 결국 자신이 태어나 자란 시대와 환경 안에서 생각하고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소비되는 걸 보면 이 역시 '존경'을 통한 의존하기의 한 행태로 보인다. 물론, 이는 쇼펜하우어 한 명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대할 때도 비판적이고 입체적인 시각보다는 맹목적인 존경이란 도구를 너무나 쉽게 써버리는 것 같다.
우리는 존경과 존중을 자주 혼동한다. 특히 한국어에서는 이 둘이 아주 다르게 쓰인다.
"나는 부모님을 존경해요"와 "나는 부모님을 존중해요"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존경은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존중은 옆에서 옆으로 마주한다.
하지만 영어로는 둘 다 "I respect my parents"라는 문장이 된다. 영어권 문화에서는 존경과 존중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일까?
옥스포드 영어사전의 respect 뜻을 보면 2가지로 설명한다.
1번 뜻은 능력, 자질, 성취로 인해 일어나는 깊은 감탄의 감정이고, 2번 뜻은 타인의 감정, 바람, 권리에 대한 적절한 배려라고 나와있다.
respect라는 단어를 분석해보자면 re와 spect로 나눠볼 수 있다. 즉, '다시 본다' 또는 '돌아본다'라는 어원적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어떤 면에 감탄해서 다시 들여다본다라는 뜻 아닐까?
하지만 한국, 일본, 중국과 같은 동아시아권 문화에서는 존경과 존중의 단어가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존경은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존경은 대상과 거리를 두게 만들고 우리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존중은 대상을 인정하며 함께 사고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런 점에서 '존중'이 존경보다 더 어려운 감정이다. 그 사람의 모순도, 약점도, 판단 실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니까. 그 사람을 동등한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당장 우리 일상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늘 좋아하던 어떤 역사적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다시 들여다보자. 성공이 아닌 실패, 사랑이 아닌 고독, 믿음이 아닌 흔들림. 그 안에 있는 인간적인 면을 보려고 해보자.
그리고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내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상상 하나로, 무조건적인 추종에서 나와 같은 선상에 놓인 대상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건, 그를 우러러보는 일이 아니라, 그를 인간으로 마주한다는 뜻이다.
존경보다 존중을, 감탄보다 사유를, 맹목보다 질문을 선택하는 것.
그게 더 어렵고 더 고된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더 깊고 더 자유로운 길이기도 하다.
"당신은 충분히 존중하고 있는가?"
존경하던 대상을 인간으로 다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정신적 게으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짜 이해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