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동물과 인간의 분리
폴 매카트니는 "도축장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벽이 불투명해서가 아니다. 현대 사회는 동물들을 우리의 시야에서,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양심에서 체계적으로 격리시키는 정교한 공간적 분리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이 분리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그 출발점이었다. 공장제 기계공업이 발달하면서 농촌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던 전통적 농업 사회는 해체되었다.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공장식 축산업은 이런 분리를 더욱 체계화했다. 동물들은 도시 외곽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고,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현대 도시에서 우리가 동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반려동물, 동물원, 그리고 식당 접시 위가 전부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철저히 감춰져 있다.
전국에 산재한 공장농장들은 의도적으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매년 10억 마리가 넘는 동물들이 좁은 케이지와 스톨에 갇혀 살다가 죽어가지만, 이 거대한 산업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하다. 한국에서 달걀의 99%, 돼지고기의 99%가 이런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되지만,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그 과정을 본 적이 없다.
실험실은 더욱 은밀하다. 대학교 지하실과 제약회사 연구소에서 수백만 마리의 동물들이 각종 실험에 사용되지만, 일반인의 접근은 철저히 차단된다. 정부의 형식적인 윤리위원회와 미흡한 가이드라인 뒤에서, 그들의 비명은 완전히 소거된다.
각 지자체의 유기동물보호소도 마찬가지다. '보호'라는 이름 아래 실제로는 대량 안락사가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에 대한 제대로 된 관리감독은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처리되는 생명들의 마지막이다.
반면 우리가 동물성 제품을 소비하는 공간은 철저히 미화되어 있다. 마트와 백화점의 정육 코너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조명으로 반짝인다. 고기는 스티로폼 트레이에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고, 때로는 웃고 있는 돼지나 소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 동물이 기꺼이 먹히기를 원하는 것처럼.
이런 마케팅의 역설은 섬뜩하다. 살아있던 개체의 흔적은 완전히 지워지고, 대신 행복한 동물의 이미지가 상품에 덧씌워진다. 소비자는 고통이 아닌 즐거움의 이미지와 함께 동물성 제품을 구매한다. 폭력은 은폐되고, 소비는 무죄한 행위가 된다.
도시화는 야생동물들을 더욱 철저히 배제했다. 한국의 조밀한 도로망은 야생동물들에게 치명적이다. 국립생태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8-2022) 전국에서 발생한 로드킬이 무려 15만 4566건에 달한다. 특히 2022년 한 해에만 6만 3989건이 발생해 심각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마저도 집계 체계의 한계로 실제 발생 건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먹이를 찾거나 짝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에게 도로는 생과 사의 경계가 되었다. 너구리, 고라니, 다람쥐들이 밤마다 목숨을 걸고 아스팔트를 건넌다. 도로가 그들의 서식지를 분할하고, 생존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인간 영역에 들어온 야생동물들을 기다리는 것은 '유해동물'이라는 딱지와 제거 대상이라는 운명이다. 인간이 그들의 서식지를 파괴해놓고, 그들이 나타나면 '해로운 존재'로 규정하는 모순.
같은 동물도 어느 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집 안의 강아지는 가족이지만, 공장농장의 돼지는 생산 단위다. 동물원의 코끼리는 보호받지만, 서커스의 코끼리는 착취당한다.
이런 임의적 경계는 법과 제도로 더욱 공고해진다. 동물보호법은 반려동물에게는 적용되지만, '축산업법'이라는 별도 법률 아래 있는 농장동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같은 생명인데도 법적 지위가 완전히 다르다.
실험동물은 더욱 기묘한 지위에 있다. '실험동물법'이라는 특별법 아래에서 '과학적 목적'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보호 규정이 면제된다. 연구실이라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동물은 법적으로 '도구'가 된다.
이 모든 공간적 분리의 궁극적 목적은 심리적 거리두기다. 물리적 거리는 도덕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기 어렵고, 책임감도 희석된다.
우리는 매일 동물성 제품을 소비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공간적 분리가 이런 '도덕적 분리'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수록, 벽이 높을수록, 우리는 더 쉽게 외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분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선 투명성이 필요하다. 공장농장과 실험실, 도축장의 실상이 공개되어야 한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구매하는 제품의 진짜 생산과정을 알 권리가 있다.
도시 설계도 바뀌어야 한다. 야생동물을 위한 이동통로(에코브릿지)를 확대하고, 도시 계획 단계부터 동물들의 서식지를 고려해야 한다. 인간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와 공유하는 공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립생태원 2024년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 설치된 생태통로(Eco bridge)는 564개로 파악된다. 전국에서 일어나는 로드킬 발생건을 생각하면 충분한 개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작정 생태통로 개수만 늘리는 것보다는 전국 도로별 및 시군구별 로드킬 데이터와 무인센서, 카메라, 시민제보를 통합해 '핫스팟'맵을 만들고, 핫스팟과 서식지 연결성 상위 구간을 우선적으로 선정해서 생태통로를 설치하도록 하면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즉, 이에 대해서 중앙정부와 각 지자체, 연구기간이 중요성을 인지하고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배정할 의지가 필요하다.
법적 구획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같은 생명체를 인간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분류하는 현재의 시스템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민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이다.
무엇보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의식적으로 추적해보는 것, 야생동물과 마주쳤을 때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 공간적 분리에 안주하지 않고 연결을 되찾으려는 노력 말이다.
폴 매카트니의 말처럼 도축장에 유리벽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분리 자체를 만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공간적 분리를 넘어 진정한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할 때다.
그 첫걸음은 보이지 않는 벽들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