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사물'로 만드는 인간 말의 기술 그리고 흔적
"도축장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폴 매카트니의 이 말은 동물권 운동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명언 중 하나다. 하지만 과연 벽이 투명해지기만 하면 될까? 설령 도축장이 유리로 만들어져도, 우리는 여전히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언어가 이미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beef'라고 말할 때와 'cow'라고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식탁 위의 음식이고, 다른 하나는 풀밭에서 풀을 뜯는 생명체다.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두 단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이것이 바로 언어가 만드는 '분리'의 기술이다.
인류는 동물을 음식으로 소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교묘한 언어적 장치를 발달시켜왔다. 영어에서 pig는 pork가 되고, cow는 beef가 되며, calf는 veal이 된다. 흥미롭게도 영어 어휘에서 이런 분리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수백년간 노르만 프랑스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영국에서는 살아있는 동물을 기르는 농민들은 앵글로색슨어(English)를 썼고, 요리된 고기를 먹는 귀족들은 프랑스어(Norman French)를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언어가 결합되어, 동물명은 게르만어 계열로, 요리명은 프랑스어 계열로 굳어진 것이다.
한국어는 어떨까? 우리는 "소고기", "닭고기"라고 말한다. 동물의 이름에 "고기"를 붙여 식품으로 변환시키는 방식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작은 접미사 하나가 살아있던 개체를 식재료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기능을 한다. "우리 집 강아지"와 "개고기"는 언어적으로는 불과 한 글자 차이지만, 인식적으로는 천지 차이다.
산업 현장에서는 더욱 정교한 분리가 일어난다. 동물들은 "가축"이 되고, "축산물"이 되며, "두수"와 "마리수"로 계량된다. 이런 용어들은 개별 동물의 '고유성'을 지우고, 대신 생산 단위로서의 기능만을 부각시킨다.
언어는 또한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완곡하게 포장'하는 기능도 한다. '죽인다'는 말 대신 '도축한다'고 하고, '학대한다' 대신 '관리한다'고 한다.
한국의 방역 현장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보자.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이 발생하면 "살처분"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이 단어는 '살생'과 '처분'의 합성어로, '대량 살육'이라는 참혹한 현실을 행정적 처리 과정으로 중성화시킨다. "폐사"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동물이 죽은 것이 아니라 "폐기된 것"처럼 들리게 만든다.
실험실에서는 동물들이 "희생된다"거나 "소모된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자원화"라는 말까지 등장한다. 이런 수동태 표현들은 행위의 주체를 흐리고, 동물의 고통을 추상적 과정으로 변환시킨다.
우리가 동물을 부르는 이름은 단순한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 동물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규범적으로 지시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가축’이라는 범주는 동물을 자연 속 개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소유·관리하고, 도구처럼 활용할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한다. 같은 소라도 ‘야생동물’일 때는 보호의 대상이지만, ‘가축’으로 불리는 순간 도축과 소비의 대상으로 당연시된다.
‘실험동물’ 역시 마찬가지다. ‘실험’이라는 단어 앞에 붙은 순간, 생명체는 더 이상 고유한 주체가 아니라 연구를 위한 소모품으로 자리매김한다. 대학 연구실, 제약회사, 화장품 회사 등에서 반복되는 희생은 이 범주가 허용하는 폭력의 연장선에 있다.
‘유해동물’이라는 말은 더 극적이다. 인간이 필요에 따라 외래종을 들여와 놓고, 더 이상 필요 없을 때는 환경을 해친다며 ‘유해하다’는 낙인을 찍는다. 대표적인 예가 뉴트리아다. 과거 모피와 고기를 얻기 위해 남미에서 수입했지만 산업적 가치가 사라지자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어 대량 포획과 살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책임은 인간에게 있지만, 낙인은 동물에게 전가된 것이다.
토종 야생동물에게도 이 언어는 무자비하게 적용된다. 고라니, 멧돼지, 비둘기는 ‘유해조수’라는 이름 아래 관리 대상이자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힌다. 논밭을 망친다, 도심 환경을 어지럽힌다, 사람에게 위협이 된다… 하지만 이는 본래 인간이 만든 개발·농업·도시화 환경에 그들이 적응하고 살아남은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유해동물’이라는 행정적 분류는 사람들에게 이들을 죽여도 되는 존재, 오히려 죽여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반대로,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은 동일한 종에게 전혀 다른 지위를 부여한다. 개는 어떤 맥락에서는 가족이 되고, 다른 맥락에서는 고기나 실험의 대상이 된다. ‘반려’라는 단어는 사랑과 보호를 전제하지만, 동시에 그것 역시 인간의 필요에 따른 분류일 뿐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품고 있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한국어 일상 언어 곳곳에는 동물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그런데 이 표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잔혹함에 소름이 돋는다.
"돼지 멱따는 소리 하네"라고 우리는 시끄러운 소리를 비유한다. 하지만 이것은 살아있는 돼지가 죽임당하는 순간 내는 비명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극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생명체가 내는 마지막 소리를 단순히 '듣기 거슬리는 소음'의 비유로 사용하는 것이다.
"개 패듯 팰 줄 알아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는 한국 시골에서 개고기를 먹기 위해 살아있는 개를 매달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던 잔혹한 방식을 일상 언어로 가져온 것이다. 극심한 폭력의 장면이 일상적 위협의 표현으로 둔갑한 것이다.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사자성어도 생각해보자.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다'는 뜻으로, 우리는 효율성의 긍정적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의 도구로 두 생명을 죽인다는 폭력적 이미지다. 두 마리 생명의 죽음이 '성과'로 포장되어 있다.
실제 동물들의 모습은 어떨까? 돼지는 사실 매우 깨끗한 동물이다. 돼지우리나 소축사가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인간이 좁은 곳에 그들을 가둬 따로 배설할 곳을 마련해주지 않아 먹고 자는 곳에서 어쩔 수 없이 배설을 하게하고, 바로 바로 치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차피 죽일 동물을 위해서 노동력을 아끼겠다는 것이다. 결코 그 동물들이 원해서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멍청하다고 비난하고 싶을 때 '닭대가리'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닭은 개보다 더 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닭은 개만큼 혹은 그보다 더 똑똑하며, 수명도 짧게는 8년에서 길게는 20년까지이다. 여우는 교활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뛰어난 적응력을 가진 동물이고, 늑대는 자기 무리를 매우 소중히 여기며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곰 역시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감정과 기억력을 가진 지능적 존재다.
하지만 언어는 이런 실제 모습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대신 인간이 임의로 덧씌운 혐오와 폄하의 이미지만을 남겨두었다. "개같은 놈", "돼지우리 같다", "닭대가리", "여우짓", "곰같이 미련한"... 이 모든 표현들은 동물의 실제 특성과는 무관하게, 오직 인간의 부정적 특성을 설명하는 도구로만 기능한다.
더 섬뜩한 것은 이런 표현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입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을 담은 언어를 아무런 의식 없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동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폄하하고 폭력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적 도구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수분류사 체계다. 사람은 "명"으로, 동물은 "마리"로 센다. 중국어, 일본어 등 동아시아 언어들이 공통으로 가진 이 체계는 매번 수량을 표현할 때마다 위계를 강제로 인식시킨다.
"강아지 다섯 명"이라고 말하면 어색하게 들린다. 반대로 "사람 다섯 마리"라고 하면 모독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단순한 문법적 관습이 아니다. 언어가 존재의 위계를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다.
영어와 같은 서구 언어에는 이런 강제적 구분이 없다. "Five dogs", "five people"로 동일한 수사를 사용한다. 이것이 더 평등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더 근본적인 분리가 있어서 굳이 언어로 구분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일까? 이는 흥미로운 언어철학적 질문이다.
언어의 힘은 법률 영역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오랫동안 대부분의 법체계에서 동물은 "물건"으로 분류되어 왔다. 이 법적 규정은 사회 전반의 언어 사용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는 1988년, 독일은 1990년, 스위스는 2002년에 각각 민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는 조항을 도입했고, 최근 2021년에는 '스페인에서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 감각을 지닌 존재(Sentient Beings)'로 민법이 개정되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는 민법 개정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2021년 입법예고에 이어 2025년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런 법언어의 변화는 단순한 조문 수정이 아니다. 사회 전체의 동물 인식 변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또 다른 인식 변화를 촉진하는 기능을 한다.
언어 변화가 인식 변화를 이끌고, 인식 변화가 정책 변화를 만들어내는 순환 구조. 이것이 바로 언어가 가진 사회적 힘이다.
언어적 분리의 또 다른 무서운 측면은 그것이 인간에게 되돌아온다는 데에 있다. "해충", "기생충", "벌레" 같은 동물 은유가 특정 인간 집단을 지칭할 때 사용되면, 그것은 폭력의 전조가 된다.
홀로코스트 연구자들은 나치가 유대인을 "쥐"로 부르며 비인간화했다고 기록한다. 르완다 대학살에서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고 불렀다. 이런 동물 은유는 대상을 '박멸해야 할 존재'로 만드는 강력한 수사적 도구가 된다.
우리가 동물에 대해 사용하는 언어적 분리 기술이 그대로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동물을 비인간화하는 언어 습관은 언제든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도구로 전용될 수 있다. 이것이 동물에 대한 언어적 폭력이 단순히 동물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언어적 분리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작은 실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뉴스나 기사에서 동물의 이름을 함께 표기하는 것, "도축"이나 "살처분" 같은 완곡어 대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것, 동물을 지칭할 때 "그것" 대신 "그 동물"이나 구체적 이름을 사용하는 것.
더 근본적으로는 동물을 비하하는 일상 표현들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돼지우리 같다" 대신 "지저분하다"고, "개같은" 대신 구체적인 비판을 하는 것. 이런 변화는 작아 보이지만, 언어가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결코 사소하지 않다.
언어를 바꾸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의 시작이다.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부르는지는 결국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와도 연결되어 있다.
폴 매카트니가 말한 유리벽은 단순히 물리적 벽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벽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언어 속에 있다. 그 벽을 허무는 일,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연결을 되찾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