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된 일상, 깨어나는 시선

잃어버린 연결, 동물과 인간_ 인식적 분리편

by 세이지SEIJI

어릴 적 나는 뱀을 보면 무조건 무섭고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지렁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반사적으로 혐오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무작정 이들을 징그럽고 무섭다고 여기는 걸까? 그냥 지구상 수많은 생물 형태 중 하나일 뿐인데.

거꾸로 생각해보니 더욱 흥미로웠다. 그들 입장에서는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더 징그럽고 기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몸통에서 팔다리가 뻗쳐나온 이 모습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기이하게 보일까. 뱀 중에도 독이 있는 종은 일부이고, 설사 독이 있다 해도 인간이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공격해오지도 않는다. 지렁이는 아예 생태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흙을 분해하고 순환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식물의 뿌리가 숨 쉴 수 있도록 땅에 공기층을 만드는 고마운 일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더 이상 뱀이나 지렁이가 예전처럼 혐오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쥐나 거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바퀴벌레는 아직도 무섭다. 갑자기 나타나고 워낙 빠르게 움직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학습된 혐오, 허용된 사랑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어떤 동물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명백히 학습된 것 같은데,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팬더나 코알라 같은 동물들을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이런 자연스러운 감정이 특정 동물들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이었다. 우리 사회는 개와 고양이, 팬더와 코알라에게는 감정적 연결을 허락하지만, 그 외의 동물들에게는 그런 과정 자체를 차단하도록 조장한다. 마치 감정에도 검열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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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이라는 잣대

그 허용과 차단을 결정하는 기준은 명확했다. 바로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있다. 우리가 동물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따라 그들에 대한 감정적 연결이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 먹는 것으로 이용하고자 정한 동물은 철저히 식재료로 취급하도록 시스템이 짜여 있고, 노동력이나 오락용으로 정한 동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나누는 동물 분류가 이 이용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험용, 전시용, 오락용, 식용, 사냥용, 애완용, 모피용, 상아·뿔·기름 등을 얻기 위한 채취용... 각각의 범주 안에서 동물들은 철저히 그 기능으로만 인식된다. 돼지는 개보다 지능이 높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쪽은 '가족'이고 한쪽은 '식재료'가 되는 이유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필사적 노력들

이런 기능별 차별과 감정 연결 차단을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인간은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데 동물은 본능적이기만 하다고. 그래서 '동물적 본능'이라는 말도 인간에게 적용할 때 매우 부정적 의미로 여겨진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욕망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비난할 때 우리는 이런 표현을 갖다 쓴다.

정작 인간은 동물을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동물의 한 종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만 해도 한 사람의 평생이 필요할 정도다. 제인 구달이 침팬지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그래도 우리가 침팬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인간이 동물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지는 고작 몇십 년에 불과하고, 그 전까지는 그저 대충 관찰한 추측을 사실인 양 떠들어댔을 뿐이다.

또한 동물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 이성이 있는지 없는지, 심지어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들먹이며 어떻게 해서든 인간보다 열등하고 하찮은 존재라고 악을 써왔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 첨단산업 시대라 떠들어대는 이 시점에서도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지, 슬픔을 느끼는지, 꿈을 꾸는지, 생물학적 본능 외에도 도덕적으로 행동하는지 등에서 맞다 틀리다 논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동물과 자신을 분리하려고 해왔는지는 자명하다. 물론 그 최종 목적은 쉽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동물을 철저히 이용하고자 하는 데 있다.



가장 교묘한 모순: 실험실의 이중잣대

그런데 여기서 가장 기가 막힌 모순이 드러난다. 그렇게 다르다고 하면서 심리학 실험이나 의약품, 화장품 실험에서는 동물을 가져다 쓴다. 그렇게 다른데 왜 동물을 가지고 실험을 할까? 그 실험 결과가 유의미하다고 본다면 결국 인간과 동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이용할 때는 "비슷하다"고 하고 이용하고 나면 다시 "전혀 다르다"고 떠들어대는 것이 정말 비논리적이고 자기 멋대로다.

실험할 때는 "인간과 충분히 비슷해서 실험 결과가 인간에게 적용 가능하다"고 하다가, 윤리적 책임을 물으면 "동물은 인간과 달라서 도덕적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고 한다. 필요에 따라 달라지는 '비슷함'의 기준이다.



일상 속 마취에서 깨어나기

이런 인식적 분리는 일상의 순간순간에 가장 교묘하게 작동한다. 마트에서 고기를 사거나 가죽 제품을 사용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한때 살아 숨 쉬던 존재였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우리를 그렇게 '마취'시키기 때문이다.

이 마취에서 깨어나려면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사고하지 말고, 한 번 멈추고 눈앞의 현상을 그 너머까지 보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거대한 시스템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적 전망: 조건이 바뀌어야 시스템이 바뀐다

결국 시스템을 바꾸려면 윤리성에만 기댈 수는 없다. 인간이 만들어온 시스템의 변화는 인간의 윤리적 깨달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저 필요성에 의해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을 역사가 잘 보여준다. 말에 대한 학대와 착취도 자동차가 생기고 나서야 겨우 끝났다. 절대 인간이 스스로 '말을 학대하면 안 되겠다'고 깨달아서 멈춘 것이 아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위급할 때만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아마 지금처럼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않고 인류 생존을 위협한다고 절실히 깨닫게 되면, 그때서야 시스템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길 것이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던 시대였지만, 지금 사람들은 노예제를 아주 미개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런 여건만 주어진다면 노예를 만들고자 하는 인간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간은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더 강하다. 이성적 사고와 판단으로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인식적 분리를 넘어서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 차원에서는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해야 한다.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 동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애써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적 한계도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변화는 조건이 바뀔 때 온다는 것, 그리고 그 조건은 대개 위기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위기의식이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고 변화의 순간이 왔을 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인식적 분리를 넘어서는 길은 멀고 험하다. 하지만 그 첫걸음은 우리 자신의 인식 속에 숨어 있는 편견과 분리의 벽들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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