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이성이 허락한 폭력

잃어버린 연결, 동물과 인간: 종교와 철학적 분리

by 세이지SEIJI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서 철학책들을 뒤적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떤 책을 펼치든, 어떤 철학자의 글을 읽든, 꼭 한 구절이 튀어나왔다.

"인간은 이성을 가졌기에 동물과 다르다." "인간만이 사유할 수 있다." "동물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만, 인간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자꾸 반복되니 거슬렸다. 그들은 동물에 대해 제대로 연구한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쉽게 단정 짓는 걸까? 인간도 다 이해하지 못해서 심리학이니 생물학이니 의학이니 수천 년째 연구하고 있으면서, 동물에 대해서는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게 이상했다.


화가 났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을 가진 더 상위의 능력"을 지녔기에 동물과 다르다고 했다. 17세기 데카르트는 살아있는 개를 마취없이 해부하며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고 "동물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처럼 말도 안 되고 우스운 이야긴 없다"며, 동물을 "정교한 부품들의 조합으로 움직이는 기계"라고 불렀다.


뭘 알고 하는 소리인가?


동물을 제대로 관찰이나 해봤는가? 함께 살아보기나 했는가? 그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행동을 오랜 시간 지켜보고,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아보려고 애쓰기나 했는가?

아니다. 그저 자기 머릿속에서 생각을 굴린 것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마치 진리인 양 선포했다.

철학자라면,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강조했던 것 아닌가.


"너 자신을 알라."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철학자들은 동물 앞에서 그 겸손을 버렸다.

아직 인간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동물에 대해서는 대충 관찰한 후 주관적 생각을 마치 과학적 진리처럼 말했다. 허구한 날 "과학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하는 짓은 미신과 뭐가 다른가?

더 화가 나는 건, 이게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당화가 필요했던 이유

사실 우리는 안다.

동물의 눈을 보면 안다. 저기 누군가 있다는 걸. 고통을 느낀다는 걸. 살고 싶어 한다는 걸. 두려워한다는 걸.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동물을 대할 때 본능적으로 연결을 느낀다. 우리도 살아 숨 쉬고, 배고프면 밥을 먹고, 고통받고 싶어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들도 똑같다는 걸 직감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직감이 문제였다.


인간을 특별하고 선택받은 존재로 만들려면, 이 연결을 끊어야 했다. 동물과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이 나섰다.


먼저 신이 허락했다.

창세기는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지배권을 부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물은 창조자 신의 지혜에 따라 동작하는 기계와 같다"고 말했다. 신이 그렇게 정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다음 이성이 증명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기계라고 선언했다. 그의 기계론은 "자연을 볼트와 너트 부속으로 전락시켰고, 이제 자연은 물질 내지 자원으로만 간주되며, 생명의 신비와 경외 같은 것은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자연의 착취에서 죄책감은 일어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존 그레이는 그의 책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원제 Straw Dogs)에서 이 정당화의 구조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그는 "플라톤에서 기독교를 거쳐, 계몽주의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구 전통은 인간과 그들의 세계에서의 위치에 대한 오만하고 잘못된 믿음 위에 세워졌다"고 지적한다.

그레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영혼을 주고 동물에게서는 빼앗았다. 그런데 계몽주의는 신을 버렸으면서도 이 위계는 그대로 유지했다. 신 대신 '이성'을 내세웠을 뿐이다. "오늘날 탈종교적 휴머니즘의 기원이 기독교에 있다"는 그의 말은 바로 이 점을 꼬집는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이 특별하다는 기독교적 믿음은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동물실험실에서 원숭이의 두개골을 열고 뇌에 전극을 꽂을 때,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과학의 진보'를 위해서니까. 공장식 축산에서 돼지가 평생 몸 하나 돌릴 수 없는 틀에 갇혀 살아도, 그건 '효율'의 문제일 뿐이다. 그들은 기계니까. 자원이니까.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신의 섭리에 대한 기독교적 믿음의 세속 버전"이라는 그레이의 통찰은 섬뜩하다. 우리는 '인류의 진보'라는 이름으로 수억 마리의 동물을 희생시키면서도, 그것이 마치 신성한 사명인 양 포장한다.

중세에는 '신의 뜻'이 동물 학대를 정당화했다면, 현대에는 '과학의 발전', '인류의 복지', '경제적 효율'이 그 자리를 대신했을 뿐이다.

신과 이성. 양쪽에서 봉인해버렸다. 이제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권리이자, 때로는 숭고한 의무가 되었다.



정당화의 역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로 동물이 그저 물건이라면, 왜 이런 정당화가 필요했을까?

우리는 연필심을 부러뜨릴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 그냥 부러뜨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동물 앞에서는 달랐다. 신을 끌어들이고, 철학자들이 나서서 논리를 세워야 했다. 회칙을 쓰고, 책을 저술하고, 이론을 만들어야 했다.

정당화의 필요성 자체가 증거다.

우리가 원래 알고 있었다는 증거. 연결되어 있었다는 증거. 그들도 고통을 느끼고, 살고 싶어 하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증거.

그 앎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 부정하기 위해, 엄청난 사상적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균열

하지만 모든 정당화는 언젠가 무너진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동물을 신의 기계라고 했지만, 놀랍게도 같은 시대, 같은 이탈리아에 전혀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1/1182~1226).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든 재산을 버리고 수도자의 길로 들어선 그는, 동물을 인간의 형제자매로 불렀다. "모든 피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꽃 앞에서 설교하며 꽃이 마치 이성을 지닌 듯 주님을 찬미하도록" 했다. 그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자신과 결합된 누이"였다.

그는 새들에게 설교했고, 마을을 공격하던 늑대를 찾아가 평화를 중재했다. 1224년, 병으로 눈이 멀어가던 그는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피조물의 찬가』(태양의 찬가)를 지었다. 당시 지배적이던 라틴어가 아닌 움브리아 지방 방언으로, 태양을 형님으로, 달과 별을 누님으로, 물과 불과 땅을 형제자매로 불렀다.

"동물을 인간처럼 존중받아야 하는 귀중한 생명체로 여겼는데, 이는 동물을 단순히 소유물 혹은 희생 제물, 즉 인간의 하급 존재로만 인식했던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파격적인 가치관이었다."

스크린샷 2025-09-30 141207.png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같은 13세기를 살았다. 둘 다 가톨릭 성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 교과서에서 배우면서, "모든 피조물이 형제자매"라고 말한 프란치스코는 잘 모를까?

데카르트가 "동물은 기계"라고 선언할 때, 같은 시대 어딘가에 동물을 다르게 본 사람은 없었을까?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동물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쪽의 철학과 신학이 주류가 되었고, 교과서에 실렸고, 상식이 되었다. 동물과 연결을 말한 사람들은 특이한 성인, 별난 사람 정도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균열은 커지고 있다.


21세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한 교황은 2015년 6월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하며 오랜 지배의 서사를 뒤집었다. 가톨릭 역사상 첫 환경 회칙이었다. 회칙의 제목 자체가 800년 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지은 『피조물의 찬가』 첫 구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는 2020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담화에서 "피조물이 우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지배할 수 있는 소유물이나 일부 소수의 자산이 아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라고 선언했다. 1979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생태계의 수호 성인으로 지정된 지 40년 만에, 그의 목소리가 다시 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철학도 바뀌었다. 1975년,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에서 "동물 역시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동물들의 이익관심도 고려되어야 한다"며 '종 차별'(speciesism)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모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생명권을 인간과 동등하게 가진다"고 말했다.

스크린샷 2025-09-30 141514.png 피터 싱어


이제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신과 이성이 동물과의 분리를 정당화했다. 그 정당화 덕분에 우리는 죄책감 없이 동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당화가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억지였다는 증거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계속 옛 서사를 붙들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원래 알고 있던 것, 동물의 눈을 보면 느껴지는 그 연결을 인정할 것인가.

정당화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균열은 점점 커지고 있다.

아니, 균열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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