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철학으로 되찾는 동물과 잃어버린 연결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과 동물권

by 세이지SEIJI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프랑스 철학자다. 2차 대전 중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가족 대부분을 홀로코스트로 잃었다. 그 참혹한 경험은 그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전쟁이 끝난 후 그가 쓴 『전체성과 무한』(1961)은 서구 철학 전통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새로운 윤리학의 선언이었다.

전체성과 무한, 1961
엠마누엘 레비나스

레비나스는 서구 철학이 지금까지 '전체성'을 추구해왔다고 비판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하나의 논리로 설명하려는 욕망. 플라톤의 이데아부터 헤겔의 절대정신까지, 서구 철학은 모든 존재를 하나의 원리로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전체성의 철학은 결국 타자를 배제하거나 억압한다. 모든 것을 내 논리, 내 체계로 이해하려 하면, 나와 다른 존재는 제거되거나 동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바로 그런 전체주의적 사고의 극단적 결과였다.

레비나스는 이에 맞서 '타자의 얼굴'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le visage'는 프랑스어로 '얼굴'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 얼굴이 아니라, 나에게 윤리적 요구를 하는 타자의 현현이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는 원초적 명령을 듣게 된다. 이 명령은 내가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 이미 나에게 부과된, 무한한 책임이다.


그렇다면 이 '얼굴'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계속 살아있고 싶어하는 각 생명체의 원초적 욕구

그 욕구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것이 타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윤리가 존재론에 앞선다고. 즉, "저 존재가 무엇인가"를 규명하기 전에 이미 "저 존재 앞에서 나는 책임이 있다"는 윤리적 관계가 먼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타자를 내 범주, 내 개념, 내 경험 안으로 집어넣는 폭력이다. 타자의 타자성, 나와 근본적으로 다름을 죽이는 '존재론적 살인'이다. 하지만 동시에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배우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을 알고 싶고, 계속 배우고 싶다"는 겸손한 자세로 타자를 대해야 한다.

이 철학은 깊이 와닿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하지만 나는 질문한다. 이 철학을 왜 인간과 인간 사이로만 한정해야 하는가? 동물에게도 '얼굴'이 있지 않은가?



동물도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내 해석에 따르면, 동물도 분명히 '얼굴'을 가지고 있다. 반려동물의 눈을 마주칠 때, 길고양이가 나를 올려다볼 때,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눈빛을 봤을 때... 우리는 안다, 그들도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들의 눈에서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써왔다. 동물을 철저히 '이용'해야 내가 살기 편하니까. 얼굴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동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레비나스가 지적했듯, 인간은 인간끼리도 얼굴을 보지 않으려 무슨 짓이든 해왔다. 홀로코스트가 그랬고, 노예제가 그랬고, 식민지배가 그랬다.


fairy-pines-iblCE7W75rQ-unsplash.jpg le visage


첫 번째 폭력: '동물'이라는 전체성

레비나스가 비판한 '전체성의 논리'는 동물에게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우선, 그 수많은 다른 종을 '동물'이라는 단어 하나에 구겨넣고 '인간 대 동물'이라는 대립 구도를 만든 것 자체가 전체성의 논리다. 개, 고양이, 소, 돼지, 새, 문어, 개미... 각자 완전히 다른 존재들인데 전부 '동물'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뭉뚱그려버리고, 그 반대편에 '인간'을 놓는다. 그 순간 이미 폭력은 시작된다. 각각의 고유한 존재성, 그들만의 '얼굴'이 지워지는 것이다.

이는 레비나스가 비판한 전체성의 논리 그 자체다.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안으로 집어넣고, 그것으로 타자를 설명했다고,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



두 번째 폭력: 이해했다는 착각

레비나스는 말했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개별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도 내가 절대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서로를 100%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우선적인 태도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을 대할 때 어땠나? 이해하려는 티끌만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단정 짓고 그게 진리인 양 떠들어댔다. "동물은 이성이 없다", "동물은 언어가 없다", "동물은 영혼이 없다", "동물은 고통을 덜 느낀다". 전부 인간 기준으로 재단하고 판단한 것들이다. 동물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세상을 경험하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개는 묶어놓고 폭염, 혹한에 놔둬도 괜찮아", "고양이는 기분나쁘니 죽여도 괜찮아" - 우리는 너무 쉽게 동물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인간이 동물에 대해 아는 것은 진짜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동물을 인간과 비교질하며 왈가왈부한다. 이것이 바로 레비나스가 말한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salman-saqib-KKmjyoVfYiQ-unsplash.jpg le visage


세 번째 폭력: 순서의 전도

레비나스는 '윤리가 존재론에 앞선다'고 했다. 타자와의 만남, 그 윤리적 관계가 모든 철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먼저 책임이 있고, 그다음에 이해가 온다.

하지만 동물에게는 정반대로 작동해왔다. 우리는 항상 먼저 물었다. "동물은 무엇인가? 이성이 있나? 영혼이 있나? 언어가 있나?" 그걸 다 규명한 후에야 "그럼 우리가 이렇게 대해도 되겠네" 하고 윤리를 결정했다.

동물이 인간과 어떻게 다른지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오만이자 폭력이다. 그냥 존재하는 것인데, 그냥 존재하는 자들끼리는 서로를 존중할 원초적 의무가 있는 것 아닌가?

"너는 동성애자니까", "너는 여자니까", "너는 유색인종이니까", "너는 노비니까", "너는 반려동물이니까", "너는 축산동물이니까" - 이렇게 범주화하며 이해했다고 착각하며 온갖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인류가 걸어온 길이다.



'바비'의 역설 - 시대적 한계에 갇힌 철학자들

2차 대전 중, 레비나스는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유대인 포로들은 매일 노동을 하러 수용소 밖으로 나갔는데, 지나가는 독일 민간인들은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한 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로들이 수용소를 나가고 돌아올 때마다 이 개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짖으며 기뻐했다. 레비나스는 이 개를 '바비'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썼다.


바비는 우리를 인간으로 인정해준 유일한 존재였다.
그 개에게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레비나스는 평생 동물의 '얼굴'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어떤 글에서는 동물에게도 얼굴이 있을 수 있다고 암시했지만, 다른 글에서는 인간만이 진정한 '얼굴'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레비나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 쓴 '분리의 기술 5: 종교와 철학편'에서 다뤘듯, 다른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로크, 니체...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 존엄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유했다. 하지만 그 '인간'의 범주는 백인 남성에 국한되어 있었고, 사고의 확장은 동물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아니, 미치지 못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배제했는지도 모른다. 동물을 윤리적 고려 대상에 포함시키면 불편해지는 게 너무 많으니까. 내 식탁의 고기, 내 발의 가죽 구두, 내 연구실의 실험동물...

레비나스도 마찬가지였다. 개 '바비'만이 수용소에서 자신의 얼굴을 오롯이 바라봐 줬다는 걸 알면서도, 동물의 얼굴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시대적 한계였을까, 개인적 한계였을까.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alejo-oBFUcnrX3Ns-unsplash.jpg le visage

우리는 이미 느낀다

동물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무한한 책임을 느껴야 하지않을까? 아니, 이미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고기를 먹을 때, 가죽 제품을 살 때, 동물원에 갈 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걸까?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고통받는 생명체를 보며 우리는 느낀다. 하지만 인간이 내내 애써온 분리의 기술로 그 감각을 차단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만 다뤄져 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철학을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로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이미 책임을 느낀다. 그 타자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얼굴을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레비나스가 남긴 진짜 질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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