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의 연결을 끊어내는 생각의 출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왔다. 철학자들은 인간만이 이성을 가졌다고 했고, 신학자들은 인간만이 영혼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언어와 도구 사용을 인간의 특권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제대로 된 관찰 없이 내려진 성급한 판단에 불과했다.
침팬지는 나뭇가지로 흰개미를 낚아 먹고, 까마귀는 철사를 구부려 도구를 만든다. 돌고래와 코끼리는 복잡한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문어는 놀라운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영혼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고, 신의 피조물이라는 주장은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다른 동물을 진짜로 구분 짓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차이를 '추상적 사고'에서 찾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믿으며, 집단적으로 실현하는 능력. 그것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다른 종과 구별 짓는 결정적 특징이다.
추상적 사고는 인류에게 엄청난 힘을 주었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 인간은 공통의 허구를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국가', '회사', '돈', '법' — 이 모든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것을 '진짜'라고 믿을 때, 수천만 명의 낯선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협력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 문명을 건설했다. 피라미드, 만리장성, 인터넷 —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실상 인류 의식이 그대로 투영된 모습이다. 이 능력 덕분에 인간은 지구상 어떤 생물종보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줄곧 이 능력을 예찬해왔다. 상상력, 창의성, 혁신 — 인간다움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이 모든 것이 추상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능력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추상적 사고는 인간을 끊임없이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완벽한 삶'을 상상한다. 광고는 완벽한 몸, 완벽한 집, 완벽한 가족을 보여준다. SNS는 타인의 행복한 순간만을 편집해서 전시한다. 우리 머릿속에는 '이상적인 나'의 모습이 있다. 성공한 나, 사랑받는 나, 인정받는 나. 그런데 현실의 나는? 늘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며 한숨을 쉬고,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초라함을 느낀다. 추상 속 이상과 구체적 현실 사이의 간극 — 그것이 우리를 매일 조금씩 깎아내린다.
우리는 '미래'를 걱정한다. 개는 내일 산책을 걱정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노후 자금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하지만 인간은? 20대에 노후를 준비하고, 건강할 때 죽음을 두려워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밤잠을 설친다. "만약 내가 해고되면?", "만약 병에 걸리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 고통을 현재로 끌어와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과거'에 갇힌다. 10년 전의 실수를 반추하며 자책한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끊임없이 다시 살면서,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애쓴다. 과거의 상처를 현재에 불러와 곱씹으며, 스스로를 벌한다. 동물은 과거에 갇히지 않는다. 사자는 어제 놓친 사냥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이미 끝난 일로 스스로를 고문한다.
우리는 '의미'를 찾아 헤맨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 이런 질문을 던지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슴은 풀을 뜯는다. 그들은 '왜'라는 질문 없이 그저 산다. 하지만 인간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의미를 찾아야 하고, 목적이 있어야 하며, 가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공허해진다. 추상적 사고는 우리에게 '의미'라는 짐을 지웠다.
영국의 정치철학 비평가 존 그레이는 그의 저서『고양이 철학』(Feline Philosophy: Cats and the Meaning of Life, 2020)에서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고양이를 관찰하며 이렇게 말한다. "고양이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존재한다." 고양이는 자신의 존재를 과하게 반성하거나 목적을 부여하려 하지 않는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햇볕이 좋으면 그곳에 누워 있다. 그들에게는 불안이 없다.
반면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다. 존 그레이는 이것이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근원이라고 본다. 우리가 만들어온 철학, 종교, 도덕 체계는 모두 이 불안을 덜어내기 위한 장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체계들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냈다. "더 나은 삶", "이상적인 자아", "의미 있는 존재" — 이 모든 추상적 개념이 우리를 현재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레이가 인용하는 몽테뉴의 일화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자신의 서재에서 고양이와 함께 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걸까?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반성했다. 인간은 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해석한다. 하지만 고양이의 관점에서 보면? 고양이는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지금 여기서 놀고 있을' 뿐이다.
몽테뉴의 고양이는 과거를 후회하지도, 미래를 걱정하지도, 존재의 의미를 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을 살았다. 존 그레이는 이것을 '고양이적인 삶의 태도'라고 부른다. 불안 없이 존재하는 능력,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충만할 수 있는 상태 —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행복의 핵심은 '현재에 머무는 것'이라고. 마음챙김, 명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 현대인이 이토록 이런 수행에 매달리는 이유는 역설적이다. 우리가 그만큼 현재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이미 사무실에 가 있다. "오늘 할 일이 뭐였지?", "그 회의에서 뭐라고 말하지?" 점심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먹지 않는다. SNS를 들여다보고,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오후 일정을 걱정한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은 여전히 직장에 있거나, 벌써 내일로 넘어가 있다.
나 역시 이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원고를 쓰면서도 "이 글이 잘 받아들여질까?" 걱정하고, 수업을 준비하면서도 "다음 달 수입은 괜찮을까?" 불안해한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도 머릿속은 끝내지 못한 일과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하다. 지금 여기, 커피 향과 친구의 목소리 — 진짜 현재는 흘러가버리고, 나는 상상 속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표류한다.
동물은 이런 식으로 살지 않는다. 사자가 햇볕을 쬘 때, 그는 온전히 거기 있다. 과거 놓친 사냥감을 아쉬워하지도, 미래의 사냥을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따스함을 느끼고, 그 순간을 산다. 새가 노래할 때, 그는 100% 노래에 집중한다. 사슴이 풀을 뜯을 때, 그는 오롯이 풀을 뜯는다.
존 그레이는 이렇게 쓴다. "고양이는 철학 체계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산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은 정반대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답을 찾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철학과 종교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체계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불행하다.
삶의 목적이 '생존'과 '행복'이라면, 인간은 과연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가?
생존의 관점에서 보자. 인간은 멸종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약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개체 수는 1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반면 바퀴벌레는 3억 년을 살아남았고, 상어는 4억 년을 견뎌냈다. 공룡이 멸종할 때도, 빙하기가 왔을 때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순수한 생존력만 놓고 보면 인간은 결코 우월하지 않다.
행복은 어떤가? 전 세계적으로 수억 명이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고통받는다. WHO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의 약 5%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병원을 찾아 진단받은 사람만 집계한 수치다. 증상이 있어도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 정신과 방문을 꺼리는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침묵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임상적 우울증까지는 아니어도 만성적인 불안, 공허함, 무기력, "뭔가 잘못되어 가는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기 싫고, 월요일이 두렵고, 미래가 불안하고,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현대를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신적 고통 속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고, 항우울제와 수면제 처방은 해마다 증가한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풍요롭기 때문에 더 불행한지도 모른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상상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이 많을수록, 현재의 삶은 부족하게 느껴진다.
야생의 사슴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인간이 일부러 고통스러운 조건에 그들을 놓지않는 이상) 늑대는 불안장애로 병원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며, 위험이 닥쳤을 때 도망친다. 복잡하지 않다. 그들의 삶에는 '더 나은 삶'이라는 추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의 삶으로 충분하다.
추상적 사고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가두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개념 — 성공, 실패, 명예, 수치, 가치, 무의미 — 안에 갇혀 산다.
동물은 자유롭다. 그들은 '성공한 사자'나 '실패한 독수리'를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자 자신이고, 독수리 자신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우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버전의 자신을 상상하고, 그 상상 속 자아와 현실의 자신을 비교하며 괴로워한다.
역설적이게도,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은 동물에게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과도하게 걱정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 머릿속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몸이 느끼는 구체적 현실 속에 머무는 것. 존 그레이가 고양이에게서 발견한 그 '그대로 있음(being)'의 지혜.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가?
어쩌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지도 모른다. 우월함이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우월'하다고 믿으며 살아온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라는 것. 불안하고, 불행하며, 현재를 살지 못하는 존재들.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정말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어도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