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이라는 허상, 지워지는 개별성

범주화, 평균이라는 폭력이 끊는 연결

by 세이지SEIJI

댓글창에서 시작된 의문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한 영상을 클릭했다. 어느 관광지에서 특정 국가 관광객이 민폐를 끼치는 내용이었다. 영상보다 더 흥미로운 건 댓글창이었다. "역시 ○○나라 사람들은 다 그래", "저 나라 사람들 원래 저래", "예의라는 게 없는 민족". 수백 개의 댓글이 한 사람의 행동을 보고 수천만 명 전체를 단죄하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저 댓글을 쓴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한 나라 안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예의 바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 왜 우리는 이토록 쉽게 개별성을 지워버리고, 범주화된 이름 하나로 수많은 존재를 뭉뚱그릴까.



범주화라는 편리한 폭력

범주화는 공통된 속성끼리 묶어서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하는 작업이다.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잃는다.

외계인이 지구를 관찰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의 눈에 우리는 그냥 '인간'이라는 종 하나로 보일 것이다. 피부색, 언어, 문화, 성격, 취향이 다른 80억 명의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라는 범주 안에 묶인 하나의 집합체. 그 순간 80억 개의 고유한 삶은 모두 지워진다.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안다. 그래서 "나를 평균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외친다. "나는 한국 사람이기 이전에 나 자신이다", "나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개별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같은 우리가 타자에게는 너무나 쉽게 이 폭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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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이라는 허상

평균이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키가 180cm인 사람과 160cm인 사람이 있을 때, 이 집단의 평균은 170cm다. 하지만 실제로 그 집단에 170cm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균은 사람들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허상에 목을 맨다. 평균 이상이 되기 위해 애쓰고, 평균에 미치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더 교묘한 것은, 이 허상을 타자에게 적용해 그들의 개별성을 지워버린다는 점이다.

"○○나라 사람들은 원래 그래"라고 말할 때, 우리는 머릿속에 '평균적인 ○○나라 사람'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허상으로 실존하는 수많은 개별자들을 재단한다.



착취를 위한 전략

개별성을 지우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전략이다. 착취하고, 억압하고, 학살하기 위한.

일본이 조선을 파괴하고자 했을 때도 '조센징'이라는 범주화로 그 안의 다양성과 개별성을 없앴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도 '유대인'이라는 범주화로 자행했다. 개별성을 인정하는 순간, 착취는 어려워진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면, 폭력을 휘두르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개별성은 지워져야 한다. 그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고, 그 범주에 부정적 속성을 부여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허상을 향해 폭력을 행사한다. 역사는 이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해왔다.



동물에게 하는 일

우리가 비인간동물에게 하는 일도 정확히 이것이다.

'개'라는 범주화에서 그친다. '돼지'라는 이름으로 묶는다. '소'라는 종으로 통칭한다. 그 순간 각각의 개, 각각의 돼지, 각각의 소가 가진 고유한 성격, 취향, 감정, 관계는 모두 지워진다.

우리 집에는 고양이 아홉 마리가 산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으면, 고양이로서 그루밍을 하고, 먹고, 배설하고, 잔다는 공통점 외에 각자가 전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팔을 베고 자야만 잠드는 고양이가 있다. 기분이 좋으면 꾹꾹이를 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쭙쭙이를 하는 이도 있다. 낯선 이가 오면 호기심에 다가가는 녀석들이 있고, 일단 숨어서 지켜보는 조심스러운 이도 있다. 내가 먹는 걸 지켜봐줘야만 밥을 먹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가 안 보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먹고 싶어 하는 고양이도 있다. 남이 이미 쓴 모래화장실에 신경 쓰지 않고 볼일을 보는 고양이가 있는가 하면, 남이 쓴 화장실을 다시 쓰는 게 더럽다며 스트레스를 받는 고양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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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이면 아홉, 전부 다 다르다. 우리 인간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그냥 '고양이'로만 본다. "고양이는 원래 그래", "고양이는 원래 까칠해", "고양이는 원래 독립적이야". 존재하지도 않는 '평균적인 고양이'를 상정하고, 그 허상으로 실존하는 개별자들을 재단한다.

개에게도, 돼지에게도, 소에게도 마찬가지다. "개는 원래 충성스러워", "돼지는 원래 더러워", "소는 원래 온순해". 범주화된 존재들을 착취한다. 개별성이 지워진 존재는 착취하기 쉽다. 한 마리 한 마리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각자가 느끼는 고통과 공포를 외면할 수 있으니까.



연결된 존재로서의 진리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비인간동물의 개별성을 지우면서, 과연 인간 사이의 개별성 존중이 가능할까?

인간은 교묘하게 선을 긋고 싶어 한다.

"우리 인간끼리는 개별성을 존중해서 인권을 지켜야지. 하지만 동물은 동물일 뿐 인간이 아니니 개별성을 존중할 필요 없어. 그게 인간에게 더 많은 이득을 주고 편한 방법이야."

하지만 세상의 원리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을 이분법으로 구분 지어놓은 것은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그저 인간 머리 속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다.

그동안 인류는 다양한 운동을 해왔다. 독재정권의 억압을 타도하고자 민주화운동을 하면서도 내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억압은 눈감았다. 여성해방운동을 하면서도 착취당하고 학대당하는 비인간동물의 상황은 나 몰라라 했다.

이런 것들은 공존할 수 없다. 나조차 나보다 더 억압당하는 존재를 무시하는데, 어떻게 그런 억압에 놓이지 않는 자들보고 내 편을 들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억압의 논리는 분리되지 않는다. 한쪽에서 개별성을 지우는 태도를 용인하면, 그 논리는 결국 나에게도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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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자각

우리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개별성을 존중받고 싶어 한다. 범주화되기를 거부하고, 평균으로 재단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타존재에 대해서는 아주 쉽게 개별성을 지우고 평균값을 내고 범주화해버린다.

유튜브 댓글창에서, 일상의 대화에서, 식탁 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 모순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 모순이 결국 우리 자신의 개별성마저 위협한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평균이라는 허상에서 벗어나는 일. 범주화의 편리함을 포기하는 일. 타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진실이 아닐까.

인간이든 비인간동물이든, 모든 존재는 평균이 아니다. 범주가 아니다. 각자가 고유한 개별자다. 이 당연한 진실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의 존엄을 위협하는 공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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