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어쩌다 '클래식'이 음악이 되었나?

클래식 음악이 콩글리시인 이유

by 세이지SEIJI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샀다. 『365일 클래식이라는 습관』. 매일 하루씩 짧은 클래식 음악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이다. 사실 나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아는 게 많지않다. 그냥 누구나 다 알만한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쇼팽, 라흐마니노프 정도 알 뿐이다. 그래서 이 참에 좀 더 클래식을 폭넓게 알아볼까해서 이 책을 샀는데, 책을 받아들고 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이라는 말 자체가 이상하지 않나?


영어에서 classic은 형용사다. '고전적인', '전형적인', 뭐 그런 뜻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게 음악 장르 이름이 되어버렸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하면 우리는 당연히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떠올린다. 형용사가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셈이다.

뭐 영어인데 영어가 아닌. . .



클래식이 아니라 클래시'컬'

음악 장르로서 쓸 때는 'classic music'이 아니라 'classical music'이어야 한다. classic이 아니라 classical. 철자 하나 차이인데, 의미는 꽤 다르다.


classic은 '훌륭해서 오래도록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A classic film"(명작 영화), "a classic novel"(고전 소설)처럼 장르를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말이다. 심지어 일상에서는 비꼬는 용도로도 쓴다. "Oh, that's classic!"이라고 하면 "아, 또 그러네. 뻔하네" 같은 뉘앙스가 된다.

"Forgetting his keys again? Classic!" (또 열쇠 잊었어? 아주 전형적이네.) → 가벼운 빈정거림


반면 classical은 훨씬 구체적이다. '서양 예술음악 전체'를 가리키거나, 혹은 서양음악사에서 1750년~1820년 사이의 '고전주의 시대'만을 지칭한다. 그래서 Cambridge Dictionary나 Oxford Learner's Dictionary 같은 사전들도 'classical music'을 "전통적인 서양 예술음악"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클래식'은 사실 '클래시컬'이어야 맞다.


영어권에서도 클래식음악에 조예가 어느정도 있는 사람이면 Do you like classical music? 이란 질문을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서양 음악사에서는 시대를 꽤 세밀하게 나누기 때문이다. 바흐가 활동하던 시기를 '바로크'(Baroque Music)라고 부르고,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시대는 고전주의(Classical Music), 쇼팽이나 브람스가 등장하면 낭만주의(Romantic Music), 드뷔시쯤 되면 인상주의(Impressionism)라고 한다. 다 다른 시대고, 다른 스타일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바로크와 낭만주의를 구분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클래식'이라고 퉁쳐서 부른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zoshua-colah-rSZ-JIks2Mo-unsplash.jpg 바로크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악기


그런데 왜 하필 '클래식'일까?

문제는 철자다. Classical이 아니라 왜 classic일까? 이 용어를 처음 조선에 들여와 번역한 자는 누구란 말인가?

이쯤에서 일본이 떠올랐다.

한국이 근현대에 받아들인 서양 지식의 상당 부분은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교육, 출판, 언론 용어 대부분이 일본식 번역을 따랐다. 음악 용어도 마찬가지다. 협주곡, 교향곡, 소나타, 성악, 기악 같은 말들이 전부 일본식 한자어 번역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렇다면 '클래식'도 혹시 일본에서 온 말이 아닐까?

찾아보니 일본에서도 똑같이 'クラシック音楽(쿠라싯쿠 온가쿠)'라고 쓴다. 일상에서는 줄여서 그냥 'クラシック'(쿠라싯쿠)라고 한다. 발음도 거의 비슷하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19세기 후반)에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Classic'을 'クラシック'으로 음차했다. 서양음악 교육 제도도 한국보다 수십 년 먼저 정착되었다. 그리고 그 용어들이 한반도로 넘어왔다.

정확한 증거 문서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황상 한국의 '클래식'은 일본의 'クラシック'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는 건 일본도 지금까지 여전히 'クラシック'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영어식으로 보면 'classical'이어야 맞는데, 일본도 여전히 원형 그대로 'classic'을 쓴다. 그리고 한국도 그걸 따라 쓰고 있다.

스크린샷 2025-11-26 145300.png 일본 NHK 방송


실수에도 사연이

'클래식'이라는 콩글리시 하나에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 식민지 시대 한국의 언어 변화, 그리고 백 년이 넘도록 이어진 문화적 관성이 모두 담겨 있다. 형용사가 명사가 되고, 틀린 영어가 고유명사가 되고, 그렇게 우리의 일상 언어로 자리 잡았다.


영어를 공부하다 보면 가끔 이런 순간들이 있다. 단어 하나가 그냥 단어가 아니라, 역사이고 문화이고, 누군가의 선택 혹은 실수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언어는 결국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해온 방식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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