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지

나의 모든 것의 시작인 당신에게

by 세인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십 년은 당연히 훌쩍 전이고, 20년이 다 되어 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정말로 오랜만이라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인 것 같아. 그냥 한 번쯤은 이야기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 나의 모든 것의 시작인 당신에게. 당신이 살아온 세월을 다시 또 내가 같은 입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된 것부터가 작지만 위대한 기적이지. 엄청난 확률을 뚫고 수많은 위기를 겪고 길고 긴 벽을 넘어 세상이라는 문밖에 내가 나왔을 때, 당신이 얼마나 설레기도 두렵기도 했을지.. 내 작은 움직임에 당황하며 놀라기도, 많이 행복해하기도 했겠지.


형식적으로라도 편지를 쓰지 않은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도 당신과 같은 입장이 되어 같은 시간들을 거치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어. 어떤 마음으로 당신이 나를 바라보았을지.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 이제는 동생이 되어버린 그때 당신. 고작 스물넷의 나이에 당신이 가진 모든 세상을 아낌없이 내게 주었는데, 참 보람도 없지. 나에게 세상을 주었는데도 하나 주지 않은 사람에게 보다도 더 못한 행동이 많았어. 한참을 앞서서 바라보고 나를 위해 이야기해 주는 당신에게, 당신과 나는 다르다며, 짜증 내고 토라지고 미워하고. 내가 그랬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원망한 적도 많았는데. 그런 것도 다 눈치채고 있었겠지.



세상에 아무리 예쁜 걸 가져다줘도
나한테는 네가 가장 소중해.



내 존재가 소중한지, 중요한지 모르겠던 세상에서 당신은 나만이 가장 소중하다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사실 잘 알지 못했어. 바쁘다며 식탁앞에 앉지 못하는 내 입에 "아휴, 내 거니까 내가 챙겨야지." 하며 뭐라도 구겨 넣으려는 당신의 정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 당신은 늘 내게 그런 말을 숨 쉬듯 해주니 그저 공기처럼 그러려니 했어. 그 모든 말과 행동들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는지, 왜 그런 말을 내게 자꾸만 들려줬던 건지. 어쩌면 매우 의도적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 알겠네.


그 따뜻한 말들 속에서 내가 든든함을 느끼고, 나를 믿어주는 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적어도 외로워하진 말라는 거. 이런 사람이 네 곁에 있다는 거. 알고 있으라는 거였지. 그래서 당신이 힘에 부치는 날에도 마음이 지친 날에도. 당신 자신 보다도 나를 생각하며, 온 마음을 몇 마디의 단어에 실어 내게 건네준 말이었다는 걸.. 내가 들어왔던 말들을 나도 똑같이 내뱉으며, 이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네..


요즘 들어 가장 고마운 건. 사실 따로 있어. 그 오랜 세월 당신의 시간을 나에게 전부 주었음에도, 다시 당신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가볍게 훨훨 날기도, 뛰기도, 쉬기도 하는 것. 그래서 이젠 나에게 내줄 시간을 만드는 게 세상 어려운 일이 되었어도. 아픈 곳 없이 무거운 짐은 모두 다 내려놓고 삶을 즐기는 당신 모습 자체가, 내겐 선물이야.


사실 그저 당신이 행복하니까 나도 행복한 건 아니야. 하염없이 일방적인 우리 사이에서 그렇게 단순할리가 없지. 지금 고될지언정 먼 훗날 나도 당신의 지금과 같은 시간이 올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안도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 얼마나 듬직한지 모르겠어. 구름 낀 듯 답답한 날이 많더라도 적어도 내 삶이 마냥 쨍쨍하게 좋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몸소 보여주고 있으니 오늘이 살아져.


평생 당신을 보며 나는 그렇게 살았어. 20대의, 30대의, 40대의 당신의 하루하루가 언제나 내겐 미리 쓰인 지도 같았어. 원하는 걸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감사함을 표할 때, 내 불리함을 전할 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기쁘고 슬프고 화가 나고 즐거운 모든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성실함, 소박함, 나에게 해주던 따스한 말투, 밑도 끝도 없이 신뢰해 주던 든든함. 하나를 해내면 열을 해낸 것처럼 감탄해 주던 얼굴. 당신이 내게 준 수많은 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나는 내가 되었어.


무심히 그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며 살아오는 시간 동안 내 안에 모든 곳에 당신이 존재하게 된 것도 같아. 그런 점에서 지금의 당신의 행복이 미래의 나의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커. 고백하자면 그게 바로 내가 당신의 지금 모습에서 느끼는 고마움의 근원적인 이유일 거야.


당신과의 모든 것에서 참 지지리도 내 생각뿐이지.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당신인데 말이야. 이런 불공정한 관계를 40년도 넘게 지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몇십 년을 이렇게 지낸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겠지. 나도 그러니까. 내어준 10개 보다 훨씬 못한 거 하나를 주려해도 그마저도 그냥 넣어두고 잘 썼으면 하는 그 마음. 돌려주지 않아도, 아무것도 내게 주지 않아도, 그저 세상에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던 그 마음을 이제 나도 느끼며, 당신을 깊이 이해하게 되네.


당신이 내 세상의 전부였는데, 나 또한 당신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던 건지도 이제 알 것 같아. "몇 살이 되어도 너는 나한테 애기야." 이런 말 당신이 자주 내게 하곤 했는데. 그 말이 뭐든 내 뜻대로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서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아니, 나 다 컸어. 이제 어른인데' 맘속으로 얘기 했었어. 근데, 이제는 그저, 오래오래, 그야말로 애기처럼 당신의 따스했던 그 품 안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드디어 정말 어른이 되어버린 건가 싶어 조금 씁쓸해지려하네.



고마워..


그래도 예전에는 당신에게 진심을 고맙다는 말을 꽤 자주 했던 것 같아. 말하지 못해도 감사함이 벅차오르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참 드물었다. 내 삶이 정신 차리지 못할 만큼 빠르게도 흘러갔어. 그저 물건으로, 현금 담긴 봉투를 전하며 그 마음이 전해지겠지 했던 것 같아.


세상에 태어나 모든 처음을 함께해 준 당신. 나의 모든 처음을 울고 웃으며 환영해 준 당신.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나를 기다리고, 사랑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을 당신에게.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의 마음을 보내.


엄마..


당신이 참 고맙습니다. 모든 나의 시간에 당신이 당신으로 있어줘서 진심으로 영광이에요.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의 관계 속에서 나는 오늘도 당신에게 많은 것을 받으며, 자랍니다. 달력을 보다 문득. 곧 다가올 5월 8일 어버이날이 보여, 정말 오랜만에 편지를 써봤어요. 내 안의 전부를 키워내 준, 알알이 채워준 당신에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는 한없이 가볍게만 느껴지네요. 부디 우리. 오래오래, 오래. 보아요. 고맙다는 말 말고, 더 깊은 감사의 마음을 꺼내 드릴 수 있을 때까지...


촘촘히 박힌 민들레 씨앗이 꼭 나같다. 엄마가 준 모든 것이 촘촘히 내가 되었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