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나를 갉아먹고 있는 걸까, 나를 성장시키고 있는 걸까.
얼마 전 친구가 추천한 애니어그램 테스트를 해보았다. 나는 7w8 유형이었는데, 많은 특성 중 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한 문장이 있었다.
바쁨을 통해 불안을 해소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불안을 바쁨으로 달래는 삶을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내게 '가만히, 쉰다'는 것은 어렵다. 뭐든 하지 않으면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만 같다. 휴식이라는 게 참 달콤하기도 한데, 그 휴식이란 게 쉽지 않은 인간이 여기 있다. 한, 두 시간 지나가게 되면 그저 가만히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근 일 년 중 온전히 집에 있는 날은 발목뼈골절로 외출 절대 금지령이 내려진 며칠 외, 365일 중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집에 있다 보면, 하다못해 책장정리라도 해야 하지 않냐라는 생각이 들고, 오디오북이라도 켜야 할 것만 같다. 시간이 그냥 일분일초 흘러가는 게 헛되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은 곧장 죄책감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압박도 느끼고 불안도 느낀다. 이제는 정말 항상 엉덩이에 불이 붙어 있어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내 온몸이 타들어 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마음으로 종종 종종 뛰어다니는 게 나란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들수록 여유가 생긴다는데.. 갈수록 여유는 더 없어진다. 그 배경에는
곧 모든 게 끝나 버릴 것 같은,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의 마감이
곧 다가오는 것 같단 생각.
그 사이 하나라도 더 하고 싶고, 해놓아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큰 것 같다. 덕분에 나의 일상은 늘 분주하다. 쉴 틈이 없고,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매일이 지속되다 보니 요즘은 좀 현실자각타임, 현타가 오는 것 같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뭔가 특별히 이룬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만족할 만한 내가, 내 삶이 되고 있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중고등학교 시험기간에도 그랬다. 평소 들여다보지 않던 무관심 분야의 시험의 경우 특히, 분주히 공부는 엄청 하는 것 같은데, 시험범위 외에 실린 모든 것들까지 그 바쁜 시험기간에 뒤지느라 막상 시험 범위는 공부도 못하고 시험을 맞이했다. (왜 꼭 갑자기 그 타이밍에, 시험범위 밖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당연히 해당 과목의 시험점수는 친구들을 위해 ? 바닥을 깔아주곤 했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어도 나의 패턴은 바뀐 게 없다. 예나 지금이나, 빙빙 겉만 돌다 막상 실속은 없는 게 나인 것 같다. 그래서 불안이라는 친구가 내 곁을 늘 지켜주는 건가.
평소 나의 불안에 대해 인식하며 살지 않았다. 오히려 즐기며 지냈던 것도 같다. 내게 익숙하지만 낯설었던 단어, 불안이라는 것에 대해 칼 구스타프 융은 “불안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창조적인 삶도 없다.”라고 한다. 엘렌 글래스고는
불안은 당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신호다.
라고도 하며 불안을 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내 생각도 비슷했다. 쉼을 불안해하는 나를, 딱히 불편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이따금 들기도 했지만, 멈추면 안 되는 경주마처럼 계속 나아가며 지냈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 그런 일상에 꽤 지쳐가는 날이 곧 잘 찾아온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냥 다 놓고만 싶어진다. 이것도 저것도 다 놓고, 마냥 투명한 백지처럼 생각 없이 삶을 흘려보내고 싶어진다. 하루 주어진 시간을 일처럼 빡빡하게 계획하지 않고, 굳이 무언가 하지 않아도 편안한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다짐을 해도 절대 하나도 놓지 못할 거란걸 잘 안다. 음. 내 삶에 그런 날이 과연 언제 오기나 할까. 휴.
지치고 힘든 건,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다. 이제와 보니 내가 지치는 이유는, 여태껏 노력을 해왔어도, 그럴듯한 결과물이 아직 없어서 인 것 같다. 내가 여태 해놓은 것들 중, 만족할 만 것들이 많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상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이를테면 글쓰기, 창작, 미지로의 여행 등은 멀고 먼 미래의 일들로 미뤄둔 채, 현재 닥친 내가 뜻하지 않은 다른 일들로 내 일상이 채워져 있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그렇다. 여전히 핵심이 아닌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불안을 해소하기에 바쁨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불안이 떠나 간 자리에 채워질 내 삶의 여유는, 꼭 하고 싶은 것, 해야만 하는 것들을 실행하고 난 뒤에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불안은 어쩌면 내 삶을 움직이는 힘이자 동시에 나를 괴롭히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의 영원한 친구와 함께 조금은 다른 여름을 보내고 싶다. 어떠한 핑계도 대지말고, 빙글빙글 주변을 서성이지말고, 진짜 핵심 문제 해결에 집중해 보자. 올해는 꼭 책 한 권을 완성하리라. 내가 쏟아부은 공연장에서의 20년 세월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 보리라. 다짐만 수천만 번째이지만. 나는 이렇게 불안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제 막 시작된 25년의 여름은 다른 방식으로 땀을 흘려보기로 한다. 불안아, 다시 한번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