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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Mar 29. 2020

우리가 몰랐던 중국 서민음식의 민낯

펄벅 소설 '대지' 

 

‘한식의 세계화’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세계화라는 기준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요리 중 세계화에 가장 ‘성공’한 케이스를 꼽자면 중국 요리가 대표적이다.  


다만 유념해야 할 점은, 세계화되어 어느 지역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중국 요리들은 중국인들이 실제로 즐기는 음식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본토에 가서 오리지널을 처음 맛본 이들은 동네 중국집과는 너무나 다른 메뉴와 맛에 배신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나라 요리나 마찬가지이지만 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려면 어느 정도의 변형이 불가피하다. 게다가 중국 요리는 그 종류 자체가 광범위하다 보니 더욱 더 혼동을 주는 것이다. 


외국인이나 관광객용이 아닌, 중국 요리의 ‘민낯’은 어떤 것일까. 펄 벅의 소설 ‘대지’를 보면 그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대지’의 배경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중국 안휘성의 한 시골 마을이다. 오늘날 중국 8대 요리로 불리는 ‘후이 차이’는 바싹 튀겨낸 생선 조림이나 자라탕 등이 유명하지만, 주인공 왕룽이 가난한 농부인 관계로 소설에는 이런 메뉴들 대신 서민들이 먹는 소박한 음식들이 주로 등장한다. 


왕룽이 결혼식을 올리는 첫 장면에서 아버지와 왕룽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그 당시 농민들의 식량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중국의 상징과 같은 차는 생각보다 귀했는지 뜨거운 물에 찻잎을 넣어 주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은(銀)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야!”라며 화를 낸다. 왕룽은 뻑뻑하고 누런 옥수수죽을 부친에게 아침상으로 차려주며 “저녁은 쌀밥이에요”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잡곡보다 흰 쌀이 더 귀한 식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내에서 돼지고기와 쇠고기, 생선, 두부와 갖가지 양념을 사가지고 황부잣집을 찾은 왕룽은 장바구니를 누군가 훔쳐갈까 안절부절한다. 이에 문지기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고기나 생선 따윈 여기서 개밥밖에 안 돼!”라며 놀려대고... 왕룽에게는 혼례를 위한 사치였지만 실상은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재료를 가지고 신부 오란은 솜씨를 발휘해 맛있는 잔칫상을 차린다. 


오란이 시집온 이후 조금씩 유복해지는 왕씨 일가. 1년이 지나고 설이 다가오자 그녀는 묵직한 돌절구에 빻은 쌀가루와 돼지기름, 흰 설탕을 섞어 ‘월병’이라는 과자를 만든다. 황부자집 같은 대갓집이 아니면 구경도 하기 힘든 것이라는 이 과자에 오란은 산초 열매나 푸른 건포도로 예쁜 무늬까지 새겨 넣는다. 왕룽과 아버지는 과자를 보며 들뜨지만, 사실 이 귀한 월병은 황부자집 마나님을 위한 선물이었다. 장식 없는 월병 맛을 칭찬하는 손님들을 보며, 왕룽은 더 좋은 과자가 있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다. 


‘대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이 대목에는, 아쉽게도 작가의 실수가 들어간 듯 하다. 월병은 설이 아니라 우리나라 추석에 해당하는 중추절에 먹는 과자이다. 게다가 원작에는 ‘쌀가루’라고 묘사돼 있는데 월병의 종류가 지역마다 다양하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 밀가루로 만들며 쌀가루로 만든 월병은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외국인이라는 한계 탓인지 ‘대지’에는 이런 오류들이 종종 발견된다. 

중국 쑤저우 관광지의 다양한 간식거리


세월이 흘러, 두 아들과 예쁜 딸을 낳으며 살아가던 이들 일가의 행복은 갑작스럽게 닥친 대기근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말 그대로 ‘안습’에 가까운 빈곤함을 보여준다. 계속되는 굶주림에 산에서 자라는 나무뿌리며 잡초마저 바닥이 나고, 평소 같으면 땔감으로 쓰던 옥수수대도 식량이 된다. 아이들은 곰팡이 핀 콩 한줌에 아귀처럼 달려들고 결국 흙가루를 물에 타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마을 사람들 몇몇이 갓난아기를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퍼지면서 일가는 가재도구를 팔아 남쪽으로 향한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한 장소는 ‘강소(江蘇)’라는 도회지이다. ‘강소’는 오늘날의 중국 장쑤성을 말하며 어느 도시라고 정확한 지명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상하이 혹은 난징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은 중국사를 공부할 때 자주 등장하는 양쯔강 이남의 ‘강남’지역으로 따뜻한 날씨에 사시사철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이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부자동네’로 분류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왕룽이 바라본 이곳의 풍경은 별천지 그 자체이다. 시장에는 고기며 채소가 넘쳐나고 그날 아침 갓 잡은 물고기와 게 등이 수조 안을 헤엄친다. 이곳 사람들은 돼지기름과 죽순, 밤을 넣고 찐 닭과 거위 내장 등을 즐겨 먹는다고 묘사돼 있다. 곡물만 해도 쌀과 밀, 대두와 팥, 누에콩, 깨 등이 즐비하고 푸줏간에는 돼지 한 마리가 붉은 살점과 여러 겹의 기름진 비계를 드러내며 걸려 있다. 그밖에도 북경오리로 추정되는 갈색으로 구워진 오리와 소금에 절인 오리 내장, 꿩이나 거위 같은 다양한 가금류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채소 종류로는 빨갛고 하얀 무를 비롯해 연근과 토란, 양배추와 샐러리, 숙주와 밤, 냉이 등이 흔하다고 묘사됐다. 그밖에도 달콤한 과일과 견과류, 연갈색으로 따끈하게 튀겨진 고구마와 돼지고기 찐만두, 찹쌀로 만든 떡 등의 간식들이 있어 아이들은 각자 구미에 맞는 것을 골라 얼굴이 기름과 설탕 범벅이 될 정도로 먹는다.    


왕룽 일가는 이 풍요로운 도시에서 구걸과 품팔이를 하며 쌀죽과 빵조각을 식량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굶는 일은 없었지만 땅을 잃은 농부의 삶은 비참하기만 하다. 어린 딸을 팔 생각을 할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던 왕룽. 그런데 이 도시에 갑작스러운 전쟁이 터지고 폭동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생각지 않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얻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돌아온 고향에서 이들 일가는 왕룽이 가져온 은화와 오란이 몰래 숨겨 두었던 보석 덕분에 몰락한 황씨 집안의 땅을 사들여 곧 거부가 된다. 그러나 가난을 벗어난 왕룽은 풍요로움에 취해 아내를 멀리하고 차관에서 몸을 팔던 기생 렌화를 첩으로 들인다. 돌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듯 오란은 렌화의 존재에 괴로워하는데... 특히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황부잣집 첩 두죈이 렌화의 하녀로 들어오자 오란의 분노의 화살은 그녀에게로 향한다.  


결국 두죈은 왕룽을 졸라 별채에 따로 부엌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이들의 씀씀이는 왕룽의 재산을 조금씩 갉아먹게 된다. 두죈이 사들이는 음식들은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는 여지와 견과류, 꿀에 절여 말린 대추, 각종 떡과 붉은 설탕, 값비싼 민물고기 등이다. 다만 왕룽 일가가 부유하게 살아가게 되면서부터 이런 식재료들은 사치품이 아니라 일상식이 되고, 나중에는 렌화 이외의 식구들도 제비집과 비둘기알 같은 귀한 음식들에 익숙해진다. 왕룽이 농사꾼으로 있을 때 즐겨 먹던 마늘 넣은 빵이며 옥수수죽은 잊혀진 음식이 되어 사라진다.


영어로는 리치(Lycee)라고 불리는 여지는 한국보다 과일이 훨씬 저렴한 편인 중국에서도 꽤 값나가는 종류에 속한다. 흔히 뷔페식당에서 보게 되는 이 열매는 그러나 냉동으로 먹으면 제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과일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특히 여지는 선도가 빨리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가 좋아하는 여지를 공수하기 위해 머나먼 강남에서 수 대의 파발마를 바꿔 가며 요즘 말로 ‘총알배송’ 해올 것을 명했다. 심지어 나중에는 파발마로도 모자라 나무를 뿌리 채 뽑아 배에 실어 오기까지 했다니 당나라의 국운이 쇠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정작 ‘대지’에서 시선을 끄는 음식들은 남쪽도시의 풍요로운 먹거리나 왕룽 일가가 부자가 됐을 때 먹는 사치스러운 메뉴가 아니다. 가난한 농민의 음식이지만 기운을 돋우는 데 더없이 좋았을 마늘은 왕룽에게 있어 소울 푸드와 같다. 그리고 오란이 처음 만나는 남편에게 받은 딱딱한 청복숭아는 무뚝뚝한 신랑이 준 귀중한 사랑의 증표이며, 첫 아이를 낳고 왕룽이 더운물에 타 주었을 붉은 설탕물은 가난하지만 행복한 시절의 소소한 사치를 보여준다. 


참고로 ‘붉은 설탕’이라고 불리는 홍탕(紅糖)은 우리의 흑설탕과 비슷하지만 정제하지 않은 사탕수수액으로 만들어 각종 영양소가 살아 있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보양식으로 불린다. 한국의 미역국처럼, 산모나 생리 중인 여성들을 위한 식품이기도 하다. 작가 펄 벅도 소설 속 인물들이 먹는 이런 음식들을 매개로 사람다운 온기를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상하이 디저트 카페의 우유푸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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