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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Dec 13. 2022

간단하고 속편한 한끼, 유럽의 수프

한때 양식 코스요리의 첫 번째 순서는 수프라는 게 국롤로 여겨졌다. 80년대 경양식당에서는 돈까스나 햄버거 스테이크 등 메인 메뉴가 나오기 전 소량의 수프가 입맛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나를 포함한 어린이들의 선택은 크림수프였는데 인스턴트 가루로 만든, 단가는 얼마 되지 않았을 수프 맛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이원복 교수는 "프랑스인들에게 수프는 적은 재료를 늘리려는 방법이라 가난한 이들이 먹는다는 인식이 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유럽을 여행할 때 수프는 생각보다 자주 접하게 되는 음식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인들의 아침은 대부분 빵과 커피면 해결되므로 굳이 수프까지 챙겨 먹는 이들이 드물다. 게다가 여행객에게 가정식으로 나오는 수프를 맛볼 일은 거의 없었고, 코스요리의 애피타이저로는 수프 말고도 아주 많은 선택지가 있다. 

프랑스식 숲 아 로뇽

하지만 이 약간 어정쩡한? 입지와는 별개로 수프 자체를 좋아했던 나는 나름 여러 종류의 수프를 사먹었다. 무엇보다, 입맛이 없거나 소화가 잘 되지 않을때 저렴하고 양이 적절한 수프는 딱 맞는 선택이었다. 나는 몇 번인가  숙소 근처 수퍼에 들러 부야베스 느낌의 해물 수프나 감자가 든 비시소와즈를 사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했다. 위 사진은 파리의 작은 비스트로에서 맛본 숲 아 로뇽이다. 다진 양파를 갈색이 돌도록 볶은 다음 물과 화이트 와인을 붓고 빵과 그뤼에르 치즈를 얹어 오븐에 돌린다. 프랑스에서는 감기에 걸렸을 때나 숙취해소용으로 먹는다고. 그런데...한입 한입 먹다보니 무언가 익숙한 맛이 나는데 그건 바로....'짜장맛'이었다. 물론 수프에 춘장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볶은 양파의 달달한 향이 은근 비슷하다.  

이탈리아의 토르텔리니 수프
미네스트로네
무청과 새우 등이 들어간 수프

유럽의 수프는 어쨌든 서민적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몇 종류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재료나 레시피가 심플하다.  위 사진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먹은 수프들이다. 한국식 국물요리에 반드시 밥을 곁들이는 것처럼 서양식 수프도 속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 파스타와 빵 같은 탄수화물 재료가 함께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첫 번째 사진은 이탈리아 만두국?이라고 할 수 있는 토르텔리니 콘소메이다. 맑은 치킨 육수에 토르텔리니만을 띄운 것으로 언뜻 허전해 보이지만 의외로 포만감을 준다. 다만 짭짤한 국물맛은 한국인들에게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두 번째 사진, 미네스트로네는 이탈리아 수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메뉴다. 토마토 베이스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들어가는 재료에는 큰 제한이 없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야채를 잘게 썰어내 끓이면 그만이다. 로마에서 갑자기 내린 비로 날이 쌀쌀해졌을 때, 잠도 안오고 출출했던 나는 문닫기 직전의 숙소 옆 식당을 찾았다. 주문 가능한 메뉴가 몇 종류 안되다 보니 급히 시킨건데, 생각지 못하게 숏 파스트 외에 '쌀알'이 들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쌀이나 보리 등 곡물을 넣은 수프는 처음이었는데 마치 맵지 않은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기분이 들어 반갑고도 신기했다. 따끈할 때 한 그릇을 비우니 마음 속 추위까지 물러나는 느낌이다. 

세 번째 수프는 볼로냐의 시장에서 맛본 것이다. 잔새우와 푸른잎 채소가 듬뿍 들어가 수프라기보단 스튜 느낌이 드는 이 음식도 어쩐지 익숙한 맛이 났다. 재료를 물어보니 feuille de navet, 즉 무청이 쓰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이름은 까먹음...) 파리에 사는 언니는 이 채소가 시래기와 비슷한 맛이 나서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다. 스페인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도 사진을 보자마자 "이거 시래기에요"라고 하는걸 보니 한국인들 사이에서 의외로 유명한 식재료인 것 같다.    

스페인에서는 두 종류의 가스파초를 맛봤다. 하나는 한국에서도 비교적 익숙한 토마토 가스파초, 두번째는 마늘과 아몬드를 사용한 아호 블랑코이다. 유럽인들이 토마토를 본격적으로 먹게 된 것은 18~19세기의 일이니 아호 블랑코 쪽이 역사는 더 긴 셈. 다만 가스파초를 먹으러 가기 전에 나는 한 가지가 걸렸다. 바로 내가 못먹는 오이가 들어간다는 것. 그런데 다행히!! 가스파초도 지역에 따라 그 종류가 상당히 많았고 당연히 오이가 없는 버전도 있었다. 안달루시아식 토마토 가스파초는 살모데호라고도 불리는데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빵가루가 많이 들어가 걸죽한 식감이다. 삶은 달걀과 하몽 등을 곁들여 먹으면 가벼운 한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아호 블랑코는 세비야의 어느 퓨전 식당에서 코스 중 하나로 나왔다. 이곳에서는 파인애플 주스와 코코넛을 첨가해 칵테일 '피냐 콜라다'와 비슷한 맛을 낸다. 의외로 마늘의 매운 맛은 거의 안 나면서 아몬드에 첨가된 코코넛이 고소한 맛을 더해 주었고, 새콤한 과일향이 식욕을 돋운다. 날씨가 더운 스페인에서 시원한 가스파초는 기운을 돋워 주는 '마시는 샐러드'로 불린다. 낯선 메뉴이긴 하지만 블렌더 하나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집에서도 해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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