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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Sep 07. 2019

영혼을 위한 '수프' 이야기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경양식집 사이드 메뉴 중 하나가 본 식사 전에 나오는 '수프'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양식 코스는 수프로 시작하는 게 정석처럼 인식돼 있었다. 보통 크림수프와 야채수프라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고 어른들은 주로 야채수프를, 아이들은 대부분이 크림수프를 선호했다. 부드럽고 고소한 수프의 맛은 곧 나올 메인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메인 요리가 없는)수프 자체도 좋아해서 오뚜기 크림수프를 종종 언니를 졸라 간식으로 먹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알고 있던 수프의 세계는 인스턴트 크림수프가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어느날 동화책에서 '단추 수프'란 이야기를 읽고 수프를 만드는 데 이렇게 다채로운 재료가 들어간다는 것에 꽤나 놀라게 됐다. 주인공 나그네는 단추 하나만으로 수프를 끓일 수 있다며 구두쇠 집주인을 낚아서 육수를 만들 뼈와 각종 채소, 우유, 향신료 등 '들어갈 거 다 들어간' 수프를 만든다. 동화책 안에는 로즈마리, 세이지 같은 낯선 식재료 이름들도 쏟아져 나왔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또 다른 동화에서는 '사과 수프'라는 것의 존재를 알고 신기해 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 사과 수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90년대 초 서점가에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특이한 제목의 책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다소 쌩뚱맞아 보이는 제목이었다. 대체 닭고기 수프가 영혼이랑 무슨 상관인지.... 아마 나 말고도 그렇게 생각한 이들이 많았던 탓인지 이 책은 나중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고서야 베스트셀러 작품으로 떠올랐다. 이런 비슷한 예로는 초판 때 '노티를 꼭 한 점만 먹고 싶구나'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던 '황석영의 맛과 추억'이 있다. 이북식 주전부리인 노티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존재였던 것. 


알고 보니 미국에서 '닭고기 수프'는 감기에 들었을 때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고춧가루 듬뿍 넣은 콩나물국에 해당하는 음식이다. 맑은 닭고기 국물에 각종 향미 야채를 넣고 닭가슴살과 파스타를 넣어 든든함을 준다고.  종류도 꽤 다양해서 줄풀의 일종이라는 와일드 라이스가 든 버전도 있고 캠벨 수프 종류 중에도 치킨 누들 수프가 포함됐다. 


치킨 누들 수프와는 전혀 다른 존재이지만, 대학 시절의 나에게도 수프는 마음의 안도를 주는 음식이었다. 당시  학생회관에는 하드롤을 파내 수프를 넣어 파는 '하드롤 수프'가 있었는데 가격은 단돈 900원. 그 시절 물가를 감안해도 상당히 저렴한데다 빵까지 꼭꼭 씹어 먹으면 든든한 한 끼가 되니 주머니가 가벼올 때, 혹은 입맛이 없을 때 먹으면 제격이었다. 이 수프의 백미는 빵 속에 수프가 푹 스며든 부분을 숟가락으로 떠 먹는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나왔으면 싶은데 요즘은 왠지 보기가 힘들어졌다.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한 게, 국물 없으면 밥 못먹는다는 한국 사람들에게 수프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맑은 국이나 이것저것 재료가 많이 들어간 찌개와 수프의 간극은 크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인스턴트 크림수프가 마치 수프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진 영향인 것 같다. 90년대 중후반쯤 유행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온 브로콜리 치즈 수프나 양송이 수프는 인스턴트에 비하면 확실히 고급이었지만 수프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인식을 바꾸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수프는 그것 하나로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주다 보니 '일부러' 사먹지는 않는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에서 'SOUP & STOCK'이라는 프랜차이즈가 성행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그러고 보면 본죽 같은 죽 체인점에서 반찬들을 별도로 판매하고 비빔밥을 메뉴에 포함시키는 이유도 든든하고 푸짐한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식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인 듯 하다. 게다가 죽마저도 양이 원체 많은데다 온갖 건더기를 때려넣다 보니 환자식이나 가벼운 식사로는 적절하지 않은 메뉴가 많아졌다. 죽 본연의 성격에 충실하고 가격 거품이 없는 식당을 찾기 어려운 게 아쉽다...(역시 마진 탓인가...ㅠㅠ)


수프 한 그릇을 제대로 만들려면 꽤나 수고가 들어가는 데 비해 결과물은 얼마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수프가 대중화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일단 주요 재료 중 하나인 닭뼈만 해도 그렇다. 서양에 닭뼈만 따로 파는 정육점이 흔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찾아보기가 힘들다. 가정에서 그나마 쉽게 닭뼈 육수를 준비하는 방법은 통닭을 살짝 익혀 살을 발라내는 것이다. 맑은 수프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콩소메의 경우 소뼈에다 산더미 같은 향미 야채를 넣고 하루 종일을 끓여내는데, 정작 국물을 우린 건더기는 쏙 빠지고 국물만 접시에 오른다. 요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나 허망해지는? 조리법이다. 더구나 맛과 향을 내는 허브며 스파이스까지 구하려면 백화점 식품코너를 돌아야 하는 등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 교수는 서양에서 수프는 가족끼리 간단히 식사할 때나 먹는 서민 음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인들이 겨울에 즐겨 먹는 양파 수프나 스페인식 야채 수프 가스파쵸가 지극히 소박한 메뉴라는 점을 생각하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다만 수프라는 음식의 범위가 엄청나게 넓은만큼 수프=간편식이란 도식도 100% 맞다고는 할 수 없다. 콩소메만 하더라도 다채로운 재료를 진국으로 담아낸 사치스러운 요리라 할 수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상어 지느러미와 제비집 수프가 고급 요리로 대접받으며, 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넣고 끓여낸 불도장도 빼놓을 수 없다. 문학적인 표현을 쓰자면, 수프는 재료의 영혼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요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런 고급 수프도 좋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경양식집 수프나 싼 값에 배를 채워주는 하드롤 수프가 종종 생각나는 이유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수프를 주는 경양식집을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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