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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Feb 01. 2021

유산으로 끝난 8주 간의 임신 일기

2020년 12월 17일 - 비정상인 몸 상태

전날 맥주 한잔을 마셨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리고 숙취가 극심했다. 내 몸이 결국 포기를 한 것인가...


12월 18일 - 임신 확인

전날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는데 숙취 현상이 있다. 몸이 무겁고 너무 좋지 않다. 이건 정말 이상한데. 병에 걸렸거나, 혹시 임신? 월경 예정일을 넘긴 지 일주일 정도 됐지만 저번 달에도 세입자가 집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월경을 2주 늦게 시작했다. 이번 달도 정상화하는 기간이려니 하고 마음 쓰지 않았다. (저번 달에 임신인 줄 알고 호들갑 떨다가 아니었음) 임신 테스트기를 해 보니 너무나 선명한 임신이다. 바로 남편을 불러와서 "이거 임신 맞지?" 물어보고 3개를 더 사 와서 해보았다. 3개 모두 매우 선명한 임신이다. 인터넷으로 계산해 보니 저번 생리부터 세서 임신 6주 차다.


남편은 우리 집이 좁다며 바로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병원에 초음파를 예약하고, 임신한 친구에게 추천받은 산모용 임신 책 <Expecting Better>, 남편은 남편용 책 <The Expectant Father>를 읽기 시작했다. 2021년부터 임신을 시도하려고 해서 2020년에 이미 임신 관련 책을 3권 정도 읽었다. 친구에게 소개받은 산후조리사님께도 연락을 취하고 (너무 인기가 많으셔서 임신 확인하면 바로 연락드려야 한다) 9월에 주례를 맡기로 한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불가피하게 불참을 알렸다. 임신하면 먹어야 한다는 엽산을 포함한 멀티비타민, 유산균, DHA를 사는데 100불을 썼다.


몸 상태: 비행기에서 멀미하는 것처럼 음식 냄새가 불쾌하고 울렁거리고 머리가 맑지 않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처럼 피곤하다. 아랫배가 생리 직전처럼 부어있고 가슴도 커졌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었고 평소 잘 자지 않는 낮잠을 2시간이나 잤다.


12월 20일 - 먹거리 업그레이드, 불편한 몸

대학 때 30대 후반 정도 된 젊은 교수님 부부가 계셨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 음식을 전부 오가닉으로 사게 되고 식재료 값이 4배가 됐다고 하셨다. 우리도 바로 식재료 직거래 시장에 가서 싱싱한 식재료를 구매했다.


임신 확인을 한 날부터 몸이 너무 좋지 않다. 거의 매일 구토를 해서 어딜 가든 토통을 들고 다닌다. (네모난 쇼핑백 안에 비닐을 씌워서 다닌다.) 후각이 너무 민감해져서 밖에서 잔디 깎는 모터 냄새, 차에서 나는 플라스틱 냄새, 거리에서 올라오는 악취 등 오만가지 냄새들이 구토를 유발한다. 하루 종일 울렁거리고 열이 나고 춥고 몸살에 걸린 것처럼 가만히 있어도 몸이 너무 불편하다. 몸이 괴로우니 잠을 자는 것 밖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스크린을 쳐다봐도 구역질이 나서 글을 쓰기 힘들고 책도 읽기 힘들다. 매일 공부하던 중국어도 당연히 못한다. 모든 오감이 불편하다. 잘 때도 배가 당기거나 아프고, 팔다리를 묶어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불편하다. 며칠 새 외모가 부쩍 늙어 보인다.


임신 3개월이 지나면 이런 증상이 없어진다는데 제발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를 두세 명은 낳고 싶은데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려니 엄두가 안 난다. 그래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니 기대해 본다. 심지어 출근하면서 이렇게 힘들게 입덧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새삼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배가 무거운 게 더 견디기 쉬울 것 같다.


솔직히 집에서 둘이 술도 자주 마시는데 이제 남편과 나는 저녁에 할게 별로 없다. 혼자 즐기는 목욕도 이젠 못 하게 됐다.


2021년 1월 1일 초음파 확인

미국 병원답게 1시간을 훌쩍 넘겨 기다리고 초음파 기계가 들어가자마자 외계인 같이 생긴 태아가 보였다. 그리고 심장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혹시 저 태아가 숨을 쉬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선생님이 초음파 기계를 몇 번 클릭하자 태아의 심장 소리가 정말 크게 들렸다. 아, 내 뱃속에 정말 생명이 존재하는구나 라는걸 느낀 순간이었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났다. 심장 소리를 비디오로 찍어서 두고 두고 꺼내어 보았다.


태아의 심장소리가 들린 다음에는 유산 확률이 정말 낮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입덧을 완화시키는 약도 처방해 주었다. 아마 항암환자들이 먹는 구토 억제제인 것 같다. 아무래도 임신 중 약을 먹는 게 내키지 않지만 처방을 받긴 받았다. 아이는 8주 2일 크기라고 했다.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그 후에는 독감주사를 맞았다. 나는 무엇이든 약이나 주사 같은 것들을 맞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임신 중에 독감에 걸리면 정말 치명적이라는 말에 독감 주사를 받았다.


입덧이 2주 넘게 지속되다 보니 나름 요령이 생겼다. 먼저, 음식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고 더 이상 음식을 먹는 게 즐겁지 않지만, 음식을 먹고 나서는 구토 욕구가 덜해진다. 그렇지만 과식하면 매우 불편하다. 그래서 배가 부르기 전까지만 요령껏 먹어야 한다. 거부감이 들지 않는 음식을 준비해 놓고 배가 고프기 전에 조금씩 먹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양파와 초콜릿과 고기와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 아시아 음식이 싫어졌고, 그나마 빵이 가장 거부감 없이 먹힌다. 매실차와 생강과 신 맛이 나는 사탕이 구토 억제에 도움이 된다.


2021년 1월 6일

컨디션이 훨씬 좋아졌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임신이 안정되어서 컨디션이 좋아진 게 아닌지 추측해 본다. 2주 전에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깨어있는 매 순간이 고통이었는데 지금 정도라면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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