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초반 3개월이 지날 때 까지는 임신 소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문화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8주에 알렸던 나도 왜 알리지 않는 게 좋은지 이해하게 됐다. 가족들이 걱정하느라 전부 나에게 몸 관리를 잘하는 방법을 당부한다. 엄마는 한국에 와서 산삼을 먹고 엄마 밥을 먹고 가라고 하고, 할머니는 똑똑한 아이가 왜 실수를 했냐고 하시고, 시어머니는 유산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신다. 모두가 찬 물을 만지지 말아라, 6개월 동안 임신 시도를 하지 말아라 등 과학적이지 않은 조언들을 해 주신다. '카더라'식의 이야기들보다 매일 유산과 임신에 대해 검색하고 공부하는 내가 알면 더 많이 알 텐데 말이다. 걱정돼서 하시는 고마운 말씀들이지만 친정과 시댁에서 모두 한 마디씩 보태니 너무 자주 들어서 피곤하다.
유산의 이유는 알기가 힘들다
시어머니는 유산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셨다. 이유를 알아야 다음 유산을 피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유산의 이유는 알기 힘들다. 일단 DNA 문제가 50~80%를 차지한다. 유산 후 할 수 있는 검사는 유산한 태낭을 검사해서 DNA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검사 후 DNA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DNA 문제 때문에 유산됐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 DNA 오류가 일어난 이유는 알 수 없다. 태낭 DNA 검사를 제외하고는 엄마와 아빠의 피를 뽑아서 유전자 검사를 해서 특정 질병이나 결함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나와 남편은 검사 결과 유전자에 문제가 없었다. 이 이상의 문제들은 난임 병원에서 따로 검사해야 한다.
한번 유산한 다음은?
첫 유산 자체로는 산모 건강이나 다음 유산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유산이 착상 실패나 착상 후 탈락을 따지면 50%에 육박할 정도, 6주에 임신 확인을 하고 나서는 20% 정도로 너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첫 유산 후 다시 유산할 확률은 한 번도 유산하지 않은 사람이 유산할 확률과 같다. 두 번째 유산부터는 그다음 유산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이때부터 난임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게 된다. 나이가 35세 이상이면 임신 계획 시기부터 난임 병원에 가서 검사들을 마치고 진행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나는 첫 번째 유산이고 나이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저 운이 안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의사는 정상적인 생리를 한 번 한 후, 바로 임신을 시도해도 좋다고 했다.
모두 산모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내게 몸을 건강히 하라고 한다. 유산의 이유는 그저 운이 안 좋았을 경우, 산모에게 문제가 있었을 경우, 그리고 정자에 문제가 있었을 경우, 이렇게 3가지가 있는데 모두들 산모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것이 반복되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상당히 건강했기 때문이다. 자료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산모에게서 비롯된 유산의 원인들은 DNA 이상을 제외하곤 산모의 나이, 산모의 당뇨 등 지병, 감염, 산모의 체중 (너무 적거나 너무 많거나), 갑상선 이상, 자궁의 모양이 이상하거나, 담배나 과한 음주 같은 것들인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DNA 이상을 제외하면 나에게 해당되는 항목이 없다.
타인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 이유
그런데 심지어 남편도 원인을 파악하고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자고(라고) 제안했다. 남편은 5%에 해당하는 계류 유산을 했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어서 비롯된 일일 거라고 추측했다. 산삼이나 찬물을 만지지 않는 것 같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카더라'설이라 해도 남들이 하라는 걸 모두 해서 나쁠 게 없다고, 내가 너무 걱정이 없는 것 같다고 나를 질책했다. 정말 화가 났다. 남편이 워낙 철두철미한 타입이라 할 수 있는걸 모두 하는 스타일이란 건 알지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남들이 하는 말을 따를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은 조언을 듣고 내 생활 방식을 모두 재점검해야 한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면서 계속 내 몸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운이 나빠서 유산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들 당연히 내 건강 문제일 거라고 가정하고 원인을 찾으려 하니 남편의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산의 원인이 남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난임의 원인은 여자 30%, 남자 30%, 이유 불명이 30% 정도로 남녀 비중이 같다. 유산의 원인은 불명이 대부분이지만, DNA 이상은 남자나 여자에게서 둘 다 나타난다. 인터넷에 찾아봐도 남성 때문에 유발된 불임이나 난임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나오지 않아서 당연히 여성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조사해 보니 남성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습관성 유산을 하는 커플을 조사해 보니 정상 커플과 비교해서 정자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 유산이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남성의 임신 준비
오늘 수정되는 정자는 100일 전에 만들어지는 정자이기 때문에 정자 건강을 좋게 하려면 적어도 100일 전부터 임신을 준비해야 한다. 남성이 하루 커피 2잔 이상을 마시면 유산 위험이 2배라고 한다. 또한, 남성의 생활 패턴에 따라 정자 건강에 영향이 가서 유산을 유발하기도 한다고 한다. 따라서 임신 준비를 위해선 흡연과 음주를 자제하고, 커피는 하루 1잔만 마시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되 과하게 하지는 말고, 잠을 잘 자야 하고, 플라스틱이나 콩, 뜨거운 목욕 등 남성 생식기능에 영향이 가는 것들을 피하고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임신하면 병원에 규칙적으로 다녀야 하는 여성들과는 달리 난임이 아니고선 남성이 검사나 관리를 받으러, 혹은 임신을 준비하러 비뇨기과에 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남성 건강과 임신/유산/난임에 대한 임상이나 연구 결과가 많이 없다.
당뇨와 정자 건강
당뇨 환자들은 정자 손상이 비당뇨 난임 환자에 비해 20% 이상 많고, 25% 정도 수가 적다고 한다. 이 연구결과는 당뇨 환자들과 비당뇨 난임 환자들을 비교한 통계라 정상 남성과 비교하면 손상 정도가 더 클 거라고 한다. 당뇨가 아니라 약간 혈당이 높은 수준이라도 마찬가지로 정자에 손상이 간다고 한다. (산모도 당뇨가 있다면 임신이 훨씬 어려워진다.) 더불어 지난 50년 동안 평균 남성의 정자 수가 반으로 감소했다. 원인은 모르나 플라스틱 같은 환경적 요인이 클 것이다. 최근 50년간 난임과 유산이 많아진 것도 인류의 정자 건강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조사를 하다 보니 유전자 손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 남편에게 원인이 있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남편에게 남들이 다 내 탓을 하며 건강을 돌보라고 할 때 그들과 같이 서서 나에게 건강 관리를 하라는 말을 하는 대신 자신의 몸을 돌아보고 자신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 조사하고 변화를 실천하라고 했다.
참고 기사
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20317/7797875/1
www.theatlantic.com/family/archive/2018/10/sperm-counts-continue-to-fall/572794/
부부 둘 중 한 명이 하루 커피를 2잔 이상 마시면 유산 위험이 2배
www.yna.co.kr/view/AKR20160325171300017
parenting.firstcry.com/articles/can-diabetes-affect-fertility-in-men-and-wo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