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는 참 좋다. 각 작가가 자신이 열정을 느끼는 분야에 대해 자유롭게 쓰는 에세이 형식의 책 시리즈다. 내가 아무리 관심 없는 분야라 하더라도 그 분야에 진정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 쓴 글을 보면 그 열정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 분야를 즐기고 깊이 생각해본 사람이 보는 관점을 읽으면 그 분야에 대해 잘 모르던 내 관점도 달라지는걸 여러 번 경험했다. 아무튼, 시리즈는 그런 의미에서 어떤 것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라 참 좋다.
<아무튼, 문구>, <아무튼, 술>, <아무튼, 요가>, <아무튼, 식물>, <아무튼, 피트니스>에 이어 읽은 <아무튼, 비건>은 조금 특별했다. 왜냐하면 단지 자신의 열정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도 비건을 지향하도록 설득하기 때문이다. 비건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동물권
인간이 사는 방식은 자연의 파괴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그 자체로도 동물들에게 해가 되지만 특히 동물을 먹는 행위는 동물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태어나서부터 죽는 과정까지 일관적으로 잔인하다. 많은 가축들이 그저 죽기 위해 살아가는 동안 자기의 몸이 겨우 들어가는 비위생적인 철창에서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고 살을 찌우며 병이 들어도 항생제로 강제로 연명되며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산다.
2. 환경 문제
동물을 사육하는 과정은 물과 토양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가축에게 먹일 음식을 재배하는데 쓰기 위해 산림이 파괴되고 세계적으로 부족한 깨끗한 물이 가축을 키우기 위해 쓰이고 또 오염된다. 또한 축산업의 탄소 배출은 전체 탄소 배출의 35% 정도로 비행기, 자동차, 기차, 선박 등 모든 교통수단을 합친 것보다 많다. 이 탄소는 오존층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에 기여한다. 사실 환경을 걱정한다면 가장 먼저 육식을 중단해야 한다.
3. 건강
가축에게 먹인 엄청난 양의 항생제와 식품 첨가물들은 고스란히 사람의 입으로 들어온다. 이 화학 물질들은 사람의 몸에서 교란을 일으키고 암을 일으키기도 한다. 첨가물 때문이 아니라도 육류 섭취는 심장질환, 중풍, 당뇨, 그리고 각종 질병들을 유발하기도 한다.
채식에 대한 정보가 더 늘어났으면
이 책은 세상에 도움이 될 책인 것 같다. 요즘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전부 채식이 육식보다 더 몸에 좋다고 한다. <아무튼, 요가>의 저자도 채식을 하고 몸의 유연성이 좋아졌다고 하고 미국의 많은 운동선수들이 몸을 위해 채식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환경 문제를 이유로 10년 전에 1년 동안 채식을 했고 1달 정도 비건도 시도하면서 체력이 약해진다고 느껴서 중단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채식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육식을 갑자기 중단하고 사라진 영양소를 보충하지도 않았다. 고기를 점차적으로 줄여 나가거나 일주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 날들을 정해놓고 늘려나가서 지속 가능한 밸런스를 찾았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하고 몇 달을 소화불량과 피부 트러블에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나 같이 무지한 사람들이 채식을 할 수 있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동물과 사람의 교감
동물을 좋아하면서도 동물의 왕국에서도 포식 동물이 사냥감을 먹는 살생은 일어나고 있으니 먹이사슬의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가축을 먹는 것도 자연의 이치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2년 전에 반려견을 입양하면서 많은걸 느꼈다. 함께 생활하며 서로에게 길들여지자 대화를 못해도 눈빛과 행동만으로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감정이 고스란히 통하고 전해졌다. 유기견이어서 너무나 겁이 많았던 아이가 오랜 시간 정을 주고, 아껴주고, 소중히 대해 주니 천천히 바뀌었다. 지금은 대화하지 않아도 이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80% 이상은 알 수 있는 가족이 되었다. 내 반려견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개는 사람과 교감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내 친구들은 모인 자리에 반려견이 있으면 다 같이 강아지에게 박수를 치고 환호해 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어떤 강아지던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한다. 사람의 호의는 개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그러면서 내가 먹는 가축에 대해서도 더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 중국의 도축 시장에서 창살로 되어있는 원형 통에 개 여러 마리가 서로에게 포개진 채로 꽉 차 있는 사진을 봤는데 사진 속 그들은 같은 동양계 믹스견인 내 반려견과 너무 닮아 있었다. 내 반려견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걸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이 아이는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너무 껴안고 가까이 있으면 귀찮아하고 편히 쉬지 못해서 협소한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개를 만나면 눈치 보고 천천히 다가가서 냄새를 맡고 탐색하느라 같이 노는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많은 개들과 좁은 공간에 몰아넣는 건 상상할 수 없고, 자기 몸에 작은 흙이라도 묻으면 깨끗해질 때까지 계속 핥을 만큼 매우 깔끔하기 때문에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살 수 없을 텐데, 그 창살 통에 꽉 차 있는 개들도 내 반려견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축으로 사육되는 잔인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조류는 몰라도 아마도 양이나 돼지나 소는 개와 다를 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와 교감하고 나니 소와 돼지도 가축이라고 여기기가 힘들어졌다. 돼지와 소는 개보다 지능이 높다는 말도 있고, 개를 키우기 전부터 이미 소의 깊은 눈망울만 보고도 그들의 지능과 감성을 느껴왔었다. 말을 못 할 뿐 지능이 높고 사람과 사랑하고 교감할 수 있는 이들이 그저 먹이사슬의 아래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가 없게 됐다. 지금은 육류를 줄였고 육식을 할 때에는 되도록이면 조류를 선택하고 있고, 달걀을 살 때도 케이지가 아닌 풀어놓고 키우는 닭이 낳은 달걀을 산다. 앞으로는 <아무튼, 비건>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계속 동물 소비를 줄여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