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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Jan 24. 2022

<최소한의 선의> 독후감

성장판 독서모임을 통해 판사였던 문유석 작가님의 책 <최소한의 선의>를 접했다. 심리학과 정신건강을 배우다 보면 '선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의 행동을 선의에 의한 한 행동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많은 갈등들이 일어난다. 서로의 선의를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갈등이 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을 타려고 바삐 가는 길에 누군가가 가방으로 내 몸을 치고 지나간다면, '왜 쳐?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만만해?'라는 생각이 들고 하루 종일 기분을 망칠 수 있다. 그렇지만 '가방이 어디 닿는 것도 모르고 지나갈 정도면 되게 급한 일이 있나 보네, 안쓰럽다'라고 생각하면 쉽게 넘길 수 있다. 타인의 선의를 믿어주고 타인이 하는 '나쁜' 행동들에 '악의는 없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머릿속으로 붙여보면 넘어가지 못할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 평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특히 끌렸던 제목이지만 <최소한의 선의>는 '선의'를 다루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헌법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노력하는지에 대한 문유석 작가의 수필이다. 어찌 보면 드라이한 주제인데 수필로 쓰여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헌법의 역할이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 가운데 다수가 '공정하다'라고 느낄 결론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었는데 이 책을 통해 새삼 헌법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지 배웠다.


인간은 존엄하다. 존엄성은 무엇인가?


헌법의 중심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데 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엄한가?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릴 자율성과 도덕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존엄하다는 건 무엇일까?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모든 인간을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인간을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헌법재판소)


'모든 인간을 목적으로 존중한다'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게 된 예가 있다. 멈출 수 없는 열차의 선로에 5명의 사람들이 서 있고 곧 열차에 치여 죽게 된다. 여기서 열차가 방향을 틀어서 어떤 한 사람이 서있는 곳에 떨어진다면 그 한 사람은 죽겠지만 선로의 5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존엄성을 따지면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에 5명의 목숨과 1명의 목숨의 경중을 따질 수 없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무한대에 5를 곱해도 결과는 무한대이기 때문에 (5 무한대 = 무한대)가 성립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랄까... 예전에 처음 이 예제를 접했을 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였던 것 같다) '당연히 열차를 틀어서 한 명을 죽이고 5명을 살려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이해를 못 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간다.


그래서 사형도 집행하지 않는 것


현대사회에서 사형이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이유도 인간의 존엄성과 맞닿아 있다. 중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사람이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회는 그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의 목숨을 사형으로 앗아가지 못한다. 


인간은 평등한가? 그렇지는 않지만 그랬으면 하는 게 법의 바람


유발 하라리는 인본주의도 기독교나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들어낸 믿음, 종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간들끼리 서로 인간이 존귀하다, 존엄하다 해주다 보니 이를 자연법칙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실체를 가지고 인간사회를 규율하게 되는 이른바 '상호 주관적 실재'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인류는 역사 중 대부분의 시간을 계급사회로 보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본주의가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왕과 귀족과 평민과 노예 계급으로 나누어져 전혀 평등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인간이 도구나 재산으로 취급받는다면 존엄하다고 볼 수 없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을 재산으로 취급하는 나라들이 있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은 현대에나 와서 생겼다.


그나마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개념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완벽한 평등은 있을 수 없다. 상속 제도가 존재하는 한 모두의 경제적 시작점이 다를 수밖에 없고, 상속 제도를 완전히 없앤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이걸 해낸 나라는 없지만) 가족이라는 단위가 존재하는 한, 교육과 가정교육 면에서 시작점이 다를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에처럼 중앙기관에서 모든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는 한, 완벽한 시작점의 평등이란 있을 수 없다. (심지어 <멋진 신세계>도 유전자의 차이로 나뉜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달성하기 힘든 이상이라도, 유토피아적이라 할지라도, 높은 이상을 추구해야만 그 비슷한 것에라도 다다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헌법이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인간다운 삶, 존엄성이 존중되는 삶


존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작가는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사회에 대해 생각한다. 본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인도에서 기차 여행을 하다 보면 기찻길 옆으로 길게 난민 캠프 같은 노숙인 거주지역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을 가릴 제대로 된 지붕 하나 없이 거적때기 밑에 몸을 누여 잠을 청하고, 당연히 화장실도 없어 대낮에 엉덩이를 까고 길가에 쭈그려 앉아 볼일을 본다. 이런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남들의 자선과 동정을 통해 최소한의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고 치자. 그것만으로 존엄하게 살 수 있을까? 사람은 일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자원을 얻고 타인과 교류하며, 사회 속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얻는다. 일을 하려면 그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야 한다. 교육의 기회도 없고 일자리도 없이 살아온 사람은 존엄하게 살 수 있을까?


읽기만 해도 속상한 관경이다. 아마 청결한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익숙해진 우리의 시선으로 봤을 때 특히 속상한 관경일 것이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인도 인구 13억 중 절반이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 노상 배변을 당연하게 여긴다. 심지어 화장실을 1억 개 지었는데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596594#home) 아마 인도인의 시선에서 생각한다면 인구의 절반이 화장실 없이 생활하는 가운데 (질병 창궐 등 위생상의 문제가 생기겠지만) 화장실 없이 생활하기 때문에 존엄하지 못한 삶이나 인간답지 못한 삶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을 것 같다. 


‘사람다운 삶’은 하나의 정해진 방식의 삶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정의 내려지는 삶이다. 우리 사회도 인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청결한 화장실을 ‘사람다운 삶’의 하나의 조건으로 볼 정도로 발전했다.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그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이 정의 내리는 ‘사람다운 삶’도 계속 발전한다. 그리고 세계화가 많이 진행된 지금, 그 정의가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바뀔지 궁금하다. 세상이 세계화되면서이 개인이 속한 사회끼리의 경계가 점점 옅어지고 세계가 하나의 사회화되고 있다. 아무리 어떤 정부들에서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외부를 향해있는 눈과 귀를 닫으려고 해도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아닌 세계를 기준으로 자신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평균적인 세계인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기준이 아주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헌법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하다.


이 책을 통해 새삼 헌법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지 배웠고 법조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법이 사회의 현 상태뿐만 아니라 사회가 나아갈 방향까지도 고려하고 사회가 바뀜에 따라 계속 개정해 나가야 하는 정성과 열정이 필요한 분야란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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