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연꽃, 바람, 그대
밤이 깊어가고 있다.
갑작스러운 전화로 오늘 오후 부산으로 내려와,
지금 나는 6월의 매미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흘러 들어오는 창문 아래,
어릴 적부터 있던 낡은 소파에 앉아
불쌍한 내 손등의 상처를 바라보고 있다.
상처가 좀처럼 아물지를 않는다.
왜,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생겨난 상처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손등에 불그스름한 보기 싫은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끈질기다.
조금 색이 옅어지는 것 같다가도 제 행동을 취소하고 만다.
나에게는 두 할머니가 있다.
두 분 모두 병을 가지고 계시고, 그들의 병은 점점 커지고만 있다.
같이 밥을 먹고 한 두어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알게 되는 사실은
그들은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몰랐다. 고통에 대해, 오늘 식탁에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대상과 내일은 그러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길 수 있을 법한 결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한다.
'몰랐다'가 아닌 '아직도 모른다'가 더 정확할 것이다.
오늘 검은 정장과 흰 와이셔츠를 입은 조금 늙어 보이는 청년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신상에 대해 물어보다가 부모의 인연도 필연인 것이고
나와 그 사람과의 횡단보도에서의 만남 또한 필연이라 했다.
하지만 내가 뒤로 몸을 빼며
신호등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초록불로 바뀌기만을 기다리곤 별 대꾸를 하지 않자,
그가 말하는 필연을 왜 거부하냐며 눈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내 선택이라는 말 대신,
"수고하세요"하며 굳은 표정으로 길을 속히 건넜다.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마음이 불편했다.
분식점을 지나, 교회를 지나, 세탁소를 지나서
역 근처에 도달할 때에도 여전히 나는 그의 말들을 불편하게 되뇌었다.
내일 할머니를 뵈러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만나야 할 사람만을 만나고 싶다.
물론 그 낯선 청년의 질문과 접근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아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내일 할머니와 한 두어 마디 하게 된다고 할지언정 제대로 해야지.
어쩌면 그 청년의 집요함처럼, 내 손등의 없어지지 않는
투지를 보이는 상처처럼,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