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내의 뇌종양 2차 재발을 의사선생님으로부터 통보받은 날이었다.
선생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말투에서 아내의 생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말을 전달받았다. 그래도 어떠한 가능성이라도 열어두고자 어느 정도 살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희박한 가능성으로는 수십 년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리 길지 않다는 답변이었다. 그의 말에 한참을 넋을 놓고 울어댔다. 병원에서.. 나와서.. 전철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내 소매와 입술. 턱. 어디하나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아마 그날의 나와 스쳤던 많은 사람들은 ‘저 놈이 미쳤나’싶었을 것이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이었다. 화장실 모퉁이 벽에 웅크린채 쥐가 난줄도 모르고 다 큰 성인이 코찔찔이가 되어 울어대다보니 눈이 팅팅 부어있었다.
그보다 더 아차했던 건 이런 모습으로 줄곧 있다간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벌써부터 겁을 주는 모양새라 생각하니 정신이 곧바로 들었다.
가장 먼저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어린나이에 엄마를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의 심적 충격은 이루 말할 것도 없으며 아이양육 방법까지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른들도 말 못할 고통인데 아이들은 오죽하겠나 싶어 또 코끝이 알싸하게 시큰해졌다.
하지만 묘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처제가 심리상담 서비스를 조심스레 추천했다.
들어보니 괜찮은 생각 같았다.
아내와 상의 끝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심리상담을 정기적으로 받기로 결정했다. 엄마의 뇌종양 항암치료가 시작된다면 아이들은 흔들릴 것이 분명했다. 아빠가 전적으로 돌보지 못한다면 아이들은 친척이나 타인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나타날 심리변화는 아빠 혼자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아니, 아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심리센터 몇 군데를 선별 후 방문상담을 통해 한 곳을 선정했다.
아이들은 말과 행동으로 부모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것은 위로가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도, 위험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부모는 이 신호를 읽고 그에 맞는 대처가 필요하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통해 그것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심리상담 선생님과 애착관계를 조금씩 형성해 가고 있었다.
아내의 병이 악화될수록 아이들의 이상행동은 눈에 띄게 커졌다.
잘 지내던 큰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거나 이유 없이 책상 아래로 숨는 행동,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 하는 증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큰아이뿐만 아니라 그동안 문제가 없어보이던 둘째 아이에게도 이상행동이 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 안그랬던 둘째아이는 말더듬이 심해졌고
[아아아..빠.. 우우우우리.. 저저저기 가가서 노노노놀아요.]
식의 표현을 구사했다.
둘째아이는 이미 상담을 마치고 등원을 기다리던 어린이집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등원을 일방적으로 거부당했다. 이렇게 현실을 빨리 직감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 어린이집의 순발력에 박수를 보낸다. 놀랍도록 빠른 대처법이지 않은가.
속도 모르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저 야단을 치거나 천천히 말하라고 다그치는 방법으로 대처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시선에서 보호 받아야하는 아이들이었기에 보호속에서 무방비상태였고 그렇게 몇 날이 더가도 호전은커녕 큰 상처가 되어 상태만 더 심각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일을 그만 둘 수도 없는 나로서는 하루하루가 미칠 노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일이 조금 빨리 끝나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큰 딸 보윤이의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1층 현관문에 내리꽃혔다.
“엄마! 왜 그래!! 어어엉엉”
놀라서 급하게 4층으로 올라 들어가보니 보윤이는 한쪽 구석에서 크게 울고 있었고 아내는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뱉어내고 있었다.
“진희야. 괜찮아?”
나는 급한 마음에 아이보다 아내를 먼저 찾았다. 그러자 뒤에 숨어있던 보윤이가
“아빠, 엄마에게 장난쳤는데 갑자기 엄마가 너무 아파했어.. 으으아앙”
엄마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리 없는 철없는 아이였지만 속상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에게서 전해들은 말은 아이들이 엄마와 놀아달라며 배 위에 앉아 장난을 쳤다고 했다. 요즘 부쩍 몸이 더 안 좋아져서 머리카락도 더 빠지고 몸도 부어 작은 바람에도 쓸려 아프다는 그녀가 엄마라는 이유로 참아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왔다. 이대로 두웠다간 아내도 아이들도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놀거라는 생각을 했어야 했고 그녀는 힘들다는 걸 분명 이야기했어야 했다. 서로 위한다는 마음에 그저 참느라 긁히고 쓸린 자국이 이제는 피를 흘렸다.
탓해서 뭣하랴. 내가 그간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약값 몇 푼 더 벌자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집안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처음엔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야단만 쳤다.
나는 아이들이 심리상담을 받는 날 심리센터를 방문해 상담선생님께 상황을 말씀드렸고 아이 행동의 의미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모가 이렇게 행동하며 대처하셔야 합니다. 너무 강하게 지적하거나 처벌하면 아이의 증상은 더 심해질뿐 차도가 없을 거예요.’라는 말씀과 함께 선생님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캐치해 날 이해시켜 주셨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믿고 따르며 애착관계가 형성되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자체만으로 심리상담은 큰 의미가 있었다. 부모에게 하지 못하는 말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선생님께 마음을 열었다는 의미다. 부모가 아닌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심리센터는 아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일상에서 아이들과 해결되지 않는 부분, 어떻게 부모가 아이에게 말해줘야 할지 모르는 것들을 상담선생님께 여쭤보고 나는 그것을 참고해 아이들을 양육했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 상담선생님을 만나지만 나는 그 시간이 내 양육법을 점검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이별을 앞둔 가족 중에 어린아이가 있다면 먼저 아이를 보호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아이들은 어릴 적 받은 충격이나 기억이 성인이 된 후에도 평생을 따라다니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옆에 누군가 떠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대인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마음이 불안하고 그 불안이 계속 이어지면 말더듬, 틱 장애(tic disorder)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먼저 심리센터에서 상담을 받아볼 것을 추천한다.
사실 가족이 아픈 상황에서 아이들까지 챙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없으면 훗날 양육과정에서 더 큰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