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러브타임’ 시간을 갖는다.
러브타임이란 가족끼리 둘러앉아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함께 공유하고 고민도 털어놓으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아이들도 좋아하는 시간이고 나 또한 매우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어느 날 보윤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학교 방과후교실 수업시간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선생님을 안고 울었다고 한다. 불과 엄마가 하늘로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보윤이의 그런 마음을 들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아, 보윤이가 엄마 많이 보고 싶었구나.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을 안고 울었구나. 잘했어.”
그리고 이렇게 더 말해주었다.
“엄마 보고 싶으면 울어도 돼. 학교에서 엄마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울어. 괜찮으니까. 보윤이 잘했어~”
그러자 아이는 자신의 말이 칭찬받을 일이란걸 몰랐던 건지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다행이었다.
다음날 방과후교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제 있었던 일을 내게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딸아이에게 들어 덤덤했지만 선생님이 꺼내기엔 어려운 말이셨던지 난감한 말투가 섞여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아버님 보윤이가..”
이후 선생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나는 엄마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윤이기에 가끔 힘들어할 때가 있다며 혹여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더라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다.
아이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학교에선 울면 안 된다’, ‘엄마 없단 얘기를 다른데서는 하지 마라’ 등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아이에게 통제하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아이의 가슴에 무거운 납을 깊이 묻고 평생을 살아가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러브 타임이 끝날 무렵 엄마와 있었던 추억 하나씩을 꺼내 공유하기로 했고 엄마와 좋았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마치 엄마가 잠시 어디에 떠나 있어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처럼 웃으며 마무리했다.
영화 “서치”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영화에는 아빠와 딸이 등장한다. 아이가 어린 시절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아빠와 둘이 살던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딸아이가 다니던 피아노레슨선생님께 전화를 하지만 6개월 전 레슨을 그만뒀다는 소식만 전해 듣는다. 딸아이의 실종과 함께 아빠가 딸아이의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지인, 친구, SNS 등을 통해 아이의 흔적을 쫓으며 아빠가 평소 알지 못했던 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바로 엄마에 관한 얘기였다. 딸은 삼촌에게 엄마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딸이 피아노레슨을 싫어했던 이유는 피아노를 볼 때마다 엄마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그 말을 자신이 아닌 삼촌에게 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때 이런 답이 돌아온다. ‘형은 물어보지 않으니까, 엄마가 떠난 후로 얘는 엄마생각 뿐인데 아빠는 엄마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니까. 애는 엄마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아빠는 문제없이 잘 성장한 밝은 딸아이로만 기억할 뿐 그런 속내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빠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 막연히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깨달은 바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 아이들에게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 그 상황을 영화로 만들어 내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상처는 치료하지 않으면 더 크게 번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곪고 터져 손쓰기 힘들어진다. 우리 부모는 아이들을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화답해야 한다. 부모가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를 강압적으로 막으면 아이는 부모 몰래 그것을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다른 탈출구를 찾았을 때 부모의 입지는 많이 좁아져 있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http://m.shanghaibang.com/shanghai/mobile/news.php?mode=view&num=47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