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일과를 마치고 러브타임을 위해 식탁에 둘러앉았다. ‘러브타임 하자’라는 말이 떨어지자 능숙하게 보윤이는 과자를 준비하고 건우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보윤이가 장난치듯 새엄마 얘기를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새엄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어 보윤이 말에 좀 놀랐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보윤아, 새엄마? 새엄마가 뭔지 알아?”
“어, 콩쥐랑 백설공주도 엄마가 죽어서 새엄마가 왔잖아.”
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새엄마는 어떻게 인식되는지 궁금해 다시 물었다.
“보윤이는 새엄마가 오면 어떨 것 같아?”
“무서울 거 같아. 우리 잘 안 돌봐줄 것 같구, 혼낼 거 같아.”
“그렇구나. 보윤이는 새엄마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아이들은 새엄마의 존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덧붙였다.
“새엄마가 올 수도 안 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가족은 몇 명이야? 보윤이, 건우, 아빠 이렇게 세 명이지? 우리 세 명 모두가 좋다고 하지 않으면 새엄마는 안 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아이들이 새엄마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을 줄은.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아이들에게는 새엄마의 존재가 자기 삶의 가장 큰 변수일 수도 있으니 당연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이들이 새엄마를 상상한다면 자신이 아는 만큼 이미지를 그리게 된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동화.
생각해보면 동화 속 계모들은 거의 악역으로만 등장한다. 사랑하는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나고 새엄마가 엄마자리를 차지하면 아빠의 눈을 피해 아이에게 나쁜 행동을 일삼는다. 왜 그렇게 비춰지는지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이야기 전개상 악역이 필요해서 그런가?) ‘백설공주’, ‘콩쥐팥쥐’, ‘신데렐라’ 등 모두 엄마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에게 위기가 닥치는 스토리다. 엄마가 먼저 떠난 것이 아이들의 잘못도 아닌데 아이들이 이런 걱정까지 하면서 산다는 것이 좀 가슴 아픈 일이다.
언제는 내가 친한 친구에게 장난으로 “괜찮아. 장가 한번 더 갈 수 있잖아”라며 농담을 던진적이 있었다. 위로받다 지친 내가 분위기 전환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그 친구는 깜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에게 강하게 말했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친구는 말을 더 이었다.
자기가 어릴 적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성장 과정에서 새어머니가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새어머니와의 마찰로 인해 가정에 큰 어려움이 있었고 자신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혹여 아이들이 아빠가 이런 말 하는 것을 들으면 아이들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다. 듣고 보니 친구의 말에 큰 공감이 되었다. 나도 완벽한 사람이 아닌데 아이들을 키우려니 여기저기 부족함이 많이 보인다.
(이미지출처: http://www.kopf.kr/news/articlePrint.html?idxno=169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