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미있게 살고 싶었다. 살아있는 사람 중에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고통의 연속인데 힘들다고만 여기면 얼마나 더 힘든 세상인가. 그래서 나는 현실을 즐기려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배우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며 즐기기 위해 노력한다. 아이들과도 즐기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 상황을 전해들은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가 애를 키운다는 게 가능해요? 주위에서 아빠가 애 키우는 건 본적이 없어서요.’ 아직은 애들이 어려서 손이 많이 가지만 애랑 잘 놀면서 키우면 된다. 작년 이맘때를 생각하면 둘째 기저귀 떼느라 하루 한번씩 이불빨래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양육은 일도 아니게 느껴진다. 뭘 이정도 가지고. 요즘엔 애들과 소통도 잘되고 말도 잘 통하는데.
우리 집은 나름 민주적이다. 위험 앞에서는 아빠의 권위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아이들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한다. 우리 집만의 규칙을 정해서 온 가족이 거기에 따르면 아빠도 규칙 안에서는 가족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함께 정한 규칙을 아빠가 어기면 아이들이 반기를 든다. ‘아빠, 우리 이렇게 하기로 했는데 왜 약속 안 지켜?’ 그러면 나는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잘못한 부분을 바로 잡는다.
심리상담 선생님께서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데 도움 된다는 말씀과 함께 집안일을 할 때 아이들에게 역할분담을 하라고 추천하셨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역할분담을 하면 아이의 자존감이 상승하고 자신도 집에 도움이 되는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모든 짐을 나 혼자 지고가려 노력하지 않는다.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에는 뭐가 있을지 고민해 보니 의외로 많았다. 요리할 때 계란 깨기, 밥상 차릴 때 수저 놓기, 빨래개기, 욕실화 정리, 신발장 정리, 장난감 정리, 옷 벗어 빨래바구니에 담기 등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다. 아이들이 아빠를 돕는 날에는 어김없이 러브타임에서 칭찬스티커를 붙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신이 나서 더 적극적으로 돕는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체험학습 당일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는 아이들을 깨워 김밥 싸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집에서 싸는 김밥은 싸는 재미 반, 싸면서 먹는 재미 반이다. 아이들에게도 미션을 부여하며 참여시켰다. 김밥에 넣을 재료를 준비하며 한명은 계란을 깨고, 다른 한 명은 맛살을 찢게 했다. 계란 깨기가 완료되면 역할을 바꿔 해 본다. 아이들은 신이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실수하더라도 그냥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이들이 실수할 것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맛살을 가르다 반 토막이 나면 김밥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지만 누구도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계란을 깨다가 계란껍질이 계란 안에 섞일 수도, 계란 그릇을 쏟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맡긴 이상 인내를 갖고 지켜보는 건 우리 부모의 몫이다. 아이가 실수로 당황하면 야단칠 일이 아니라 잘 다독여야 한다. ‘아빠도 어릴 때 이렇게 많이 쏟았어. 괜찮아. 하다보면 쏟을 수도 있지 뭐. 도와줘서 고마워~’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이내 마음이 풀린다.
사실 일의 능률만 따진다면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후딱 해버리면 일거리가 훨씬 줄어든다. 하지만 일하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해 매번 미안한데 이렇게라도 함께하면 얼마나 좋은가.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운다. 부모가 삶을 즐기지 못하고 한탄 하면 그의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살게 된다.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면 내가 행복하게 살면 된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시기도 잠깐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그땐 우리와 놀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애들이 우리와 놀아줄 때 함께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