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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에 가까웠던 것 같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허물없음'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주 어렸던 아이시절부터 나는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소위 '선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마음 상할 것 같은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았고,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시뮬레이션을 해 본 뒤에 나의 말과 행동을 출력하는 편이었다.
물론 갈등을 싫어하고 감정소모를 싫어하는 성정탓이기도 하다. 이런 나의 성향이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결코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언의 의도가 숨어있다는 것을 나 자신도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내가 가깝다고 여겼던 친구들에게조차 '쓸데없는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까닭은 바로 내 자신이 감정적으로 상처받거나 기분이 상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상대방도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을 만큼의 적정거리를 늘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무례함을 참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아무렇지도 않을 말과 행동에도 남몰래 상처받고 몽실해져 버리는 나이기에 늘 어느정도의 안전거리를 확보해두는 자기 보호 본능. 그래서 겉으로 보여지는 인간관계는 평화롭고 안온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다가갈 수 없도록 거리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미처 방어할 틈도 없이 공격받게 되더라도, 그 상대에 대해 기대가 없으면 실망조차 없기에. 누군가에게 쉽게 기대하지 않으며 나의 마음속 선 긋기 작업은 부지런히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늘 마음 한 구석으로는 나도 모르게 기대하고 만다. 누군가 남몰래 그어놓은 내 마음속 반경의 테두리를 능청스럽게 불쑥 걸어들어와주기를.
그리고 내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리며 야, 임마! 하고 허물없이 웃으며 꼬옥 껴안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