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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년 만에. 수십 번. 몇 십배는 더. 단 한 번도. 평소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는 표현들에 숫자가 꽤 자주 등장한다는 것을 의식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굳이 숫자를 내세워 표현하지 않아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는 거의 지장이 없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더 분명히 전달하고 싶을 때마다 숫자를 소환하게 된다.
나부터도 그 숫자파워를 꽤 자주, 유용하게 활용하는 편이다. 주로 아이들과 대화할 때 활용 빈도가 급증한다. 왜냐하면 아주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지금 선생님을 보고 있지 않은 사람이 5명,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3명 있네요.'
'선생님이 이 것은 꼭 주의해야 한다고 19번은 말한 것 같은데요.'
'어제 숙제 안 한 사람은 7명, 오늘 숙제 안 한 사람은 8명이나 되다니.'
'어제는 13분 늦어서 지각했는데, 오늘은 8분 늦었구나. 그래도 조금은 발전했는걸!'
위 표현들을 오래전, 그러니까 숫자파워를 활용하지 않았을 때 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금 선생님 안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네.'
'선생님이 이것은 꼭 주의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제도 숙제 안 해온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도 이렇게 많다니..!'
'어제도 지각에, 오늘도 지각했구나'
차이점이 느껴지는가. 숫자를 뺀 표현은 의외로 아주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게다가 그 모호함 속에 상대방이 숨을 수 있는 은신처까지 마련해 준다. 적당히 '이것'과 '저것'과 '많고' 적음'의 형용사들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아무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실은 예시를 너무 극 현실적인 것들로 들었을 뿐, 누군가에게 닿고 싶고 전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때에도 의외로 구체적인 숫자가 마음을 울리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 콕 집어서 명확하게 감동을 주는 짜릿함이 있다.
숫자 = 이성과, 논리, 냉철함의 이미지라는 자동 알고리즘은 사실 숫자에게 씌워진 억울한 누명이라고 내가 대신 해명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 실은 오늘 네 생각 97번 했잖아.'
'너 주려고 5개 더 사 왔지.'
'네 생각날 때마다 편지 쓰다 보니 10통이나 썼더라고.'
'밥은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5분 돌려서 데워 먹고, 미역국은 냉장고 2번째 칸에 있으니까 꺼내서 데워 먹고. 김치는 3일 정도밖에 두었다가 익혀서 먹어.'
굳이 숫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 전해지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더 또렷하고 분명한 형태를 띠고서 느껴지는 것들. 굳이 97번이 아니라 197번이든 9700번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27번은 썼다가, 다시 지웠다가. 이렇게 끄적임으로 남겨두는 오늘의,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