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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이 있다. 본인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거나,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웠던 아기 시절을 벗어나 스스로의 자아와 의지를 표현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일곱 살 즈음이기에 생겨난 말 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미운 일곱 살에도 (아마) 나의 의지보다는 눈치껏 주변에 잘 물들어 흡수되는 삶을 터득했다. 그것이 이쁨 받고 칭찬이라도 한 마디 더 들을 수 있는 둘째의 생존 전략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게다가 튀어나온 솔기만 한 거슬림과 갈등에도 참을 수 없이 에너지 소모를 해버리고 마는 탓에 무조건 모든 선택의 제1순위 기준은 '주변과 갈등을 겪지 않을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관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있으면 영 불편한 사람들. 마치 아귀가 맞지 않는 레고 블록을 억지로 대충 힘으로 눌러 끼워 맞춘 듯한 그런 관계들 속에서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생애 최대의 연기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내가 진심으로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나는 무언가 맞지 않고, 불편한 상황과 선택과 관계들 속에서도 '분명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
'나다움'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는 것.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나는 나의 색과, 무늬와 결을 지닌 '나'라는 사람임을 늘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제 제법 나이가 든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조금 달라진 기분이 든다.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상황과 선택들, 인간관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선을 긋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가차 없이 냉랭한 표정과 태도로 등을 돌린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무례함은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결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들과 뜻을 함께할 동지들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나를 잃어가면서까지 애를 써야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다워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그들다워질 수 있도록.
서로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상황, 선택, 인간관계들의 손을 잡고서 아름다운 결을 이루며 걸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