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하루 한 글

스며드는 일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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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어린이였다. 스스로 말하기 조금 머쓱하지만 꽤 재능도 있었던 것 같다. 내향인인 나의 성향에도 꼭 맞았고, 내가 원하는대로 무언가를 상상하여 그리고 만들어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무척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던 풍경들, 늘 보아왔던 사물들조차 그림을 그리기 위해 관찰하다 보면 손톱만한 크기의 사물에도 수많은 색의 조합과 표면의 굴곡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무언가를 보고, 또 바라보다가. 눈에 담았던 그것들을 최대한 닮은 모습으로 도화지에 옮겨 담아내는 시간. 시간을 쏟고, 마음을 쏟아 나의 시선으로 그려낸 그 무언가는 어느 새 내 눈과 마음에 오래 오래 잔영으로 남았다.

인생에서 많은 것들이 다가오고, 멀어져갔다. 그것이 풍경일 때도 있었고, 물건이기도 하였다가. 잊지 못할 사건이기도 했고, 장소와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들.

예고도 없이 사고처럼 반짝 , 쿵 하고 나타나기도 했고 언제부터 내 곁에 와 있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있기도 했다. 비록 지금은 내 곁에 없지만 마치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여전한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의 공통점은 아주 천천히 스며들듯 나의 삶에 다가와 머물렀던 것들. 요란스럽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존재감으로 오래오래 나에게 머물렀던 것들이다. 마치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시간과 마음의 품을 들였던 것 처럼.

조용히, 천천히 나 여기 있다고 생색내지 않은 채

그저 그 곁에, 그 안에 머무르는일.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스며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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