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하루 한 글

여백이 많은 사람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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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리고 여전히 대화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로 mbti가 종종 등장한다. 그 공식에 나를 대입하자면 나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 다소 극단적이리만큼 한 쪽으로 치우친 사람이다. 극강의 I와 N과 F, P의 성향을 지닌 사람. 어떻게 보면 아주 명확한 특징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다르게 보면 중간이 없는 성향이랄까.

주로 혼자 여행을 떠나는지라 미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필요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계획을 세우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성정으로 나의 여행 계획은 늘 글의 목차같다. 문득 마치 테니스 라켓같이 성근 계획을 세운 나를 보며 깜짝 놀라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그 친구는 엑셀 파일에 분단위로 쪼개어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파워 J 성향의 친구였다.) 나는 인생의 디폴트 값이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음'이므로 계획을 세워보았자 그대로 흘러갈리가 만무한데 그렇게까지 빡빡한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 그 친구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언제 어디로 가야할 지 아무것도 모른 채 방황하며 마주할 공포를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물론 성향과 사고의 차이이므로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를 가릴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문득, 나는 내 삶의 도화지에 의식적으로 여기 저기 여백을 남겨두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여백들은 변덕스러운 내 마음이 언제 또 바뀔 지 몰라 남겨두는 플랜 B를 위한 공간들일지도 모른다. 지금 그리고 있는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시침 뚝 떼고서 빈 공간에 스윽 다른 그림을 끄적이기 위해서.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온 슬픔과 아픔의 순간들마다, 한 발짝 옆으로 벗어나 몸을 웅크리고 엉엉 울며 눈물 좀 쏟아내다가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마련해 두는 방공호들.

세상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며 짜 놓은 거푸집에 나를 꾸역꾸역 집어넣으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른걸. 하고 새침하게 빠져나와 나만의 생각으로 채워가는 나의 영역들.

실은 인생의 여백이란,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나만의 것으로 채워가는 공간들이라 믿기에.

나는 앞으로도 내 삶의 여정 속 여백들을

퐁당 퐁당 건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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