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하루 한 글

삶은 소비의 역사다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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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영수증'이라는 책이 있다. 얼핏 들어서는 정신과 진료 후의 영수증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작가님 성함이 '정신'이시고 책은 작가님이 모은 영수증과 그에 담긴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이다. 아주 오래전에 첫 책이 출간되었었고, 최근에도 같은 주제로 신간이 나왔다. 처음 작가님의 책을 읽었을 때 약간의 충격에 가까운 기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도 가방 어딘가에 무심코 찔러넣어 두었던 영수증들 속에, 그 순간 내 인생 한 장면이 무심코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것을 더욱 분명히 느끼게 되는 것은 여행을 다녀온 뒤 가방을 정리할 때다. 왠지 쓰레기통에 버리기엔 그것조차 추억같이 느껴져 차마 버리지 못하고 동전지갑에, 손가방 어딘가에 차곡히 모인채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영수증들의 정체를 하나하나 복기해가다 보면 그 소비의 순간들이 영수증을 촉매로 하나 둘 소환된다. 이름모를 골목을 걷다가 목이 타서 눈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골랐던 음료수. 일상에서는 귀찮아서 웨이팅 같은건 하지도 않는데 여행자의 도전의식으로 낯선 나라의 유명한 식당에서 한참을 기다려 주문한 음식들의 영수증. 관광지에서의 입장티켓과 영수증. 여행 중 차오르는 쓸쓸함을 달래려 찾은 포근한 카페에서 주문한 달콤한 디저트와 커피의 가격이 찍힌 영수증까지.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들을 펴가며 눈으로 좇아가다 보면 그 순간과 시절의 서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소비의 기록을 복기하다보면 그 시절의 인간관계, 내가 집중했던 것들,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도 깨닫게 된다. 자주 만난 사람, 흠뻑 빠져있던 관심분야. 소비의 빈도가 잦은 카테고리가 의미하는 것은 내 삶에서의 중요도이기도 했을테니까. '소비'라는 것이 비단 금전적인 소비와 지출 뿐만 아니라, 나의 관심과 집중 그리고 에너지의 소비까지도 포함한다고 보면 더더욱 그렇다.


삶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소비의 역사다.

삶의 매 순간 돈과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을 쓰며 살아가는 것이기에.

오늘의 나는 내 삶에 어떤 소비의 역사를 남긴 하루를 보냈을까.

우선 카드 앱을 켜서 실시간 사용내역부터 복기 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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