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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Nov 19. 2023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 만든 사라지는 것

그림책 읽은 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사라지는 것들>

매일 머리를 감으면서 빠지는 머리카락에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이 오십을 앞에 두고 몸에 생긴 변화가 낯설기도 하고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하기도 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미용실에 가면 디자이너가 늘 하던 말이 "머리숱이 참 많으시네요."라는 것이었고, 그럴 때면 "나는 왜 이렇게 머리숱이 많은 걸까? 좀 빠져야 머리가 부스스하지 않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요즈음 머리감은 후 모여있는 머리카락들과 머리를 말리면서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을 보면, 그때 내가 무슨 생각 을 했던 것인지 한심하기까지 하다.


한 올의 머리카락이 아쉬울 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그림책을 만났다.

"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사라진단다. 변하기도 하고, 휙 지나가 버리지."라는 글로 이 책은 시작한다. 그러면서 하나 둘 변하고, 휙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름종이 위에 그려 넣고 비치는 기름종이를 넘기면 사라져 변해있는 그림들이 책에 담겨있는데,  일상에서 만나는 '사라지는 것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아 놀라울 따름이다. 잠, 상처, 음악, 비눗방울, 벌레, 우울한 생각들, 눈물, 궂은 날씨, 두려움, 낙엽, 그리고 머리카락...

배우고 공부해서 아는 것, 지인이 겪는 것을 곁에서 함께 지켜보고서 아는 것, 그리고 비로소 내가 맞닥뜨리고 경험해서 아는 것, 이 세 가지 모두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막상 머리카락이 빠지는 경험을 직접 하고서는 이 세 가지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서는 결국 다짐한다.

"아, 쉽게 너의 상황을 안다고, 나는 너를 이해한다고 하지 말아야지."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나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사라졌고, 이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였을 때는 모르다가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친구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다. 새 학년이 되고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서'를 써오라고 할 때면, 나는 학기 초의 그 관문이 참으로 힘들었다. 부모님의 직업, 학력, 그리고 집에 자동차가 있는지, 집은 자가인지 등을 써서 내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모두 엎드려라고 하면서(엎드리라고 한 후 손을 들라고 하는 분은 그나마 생각이 있으셨던 분) 하나하나 항목을 말하고 손들라고 하면, 나는 어린 마음에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재어가며 손을 들까 말까를 고민했었다. 그때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가정환경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진행했던 부와 빈을 체크했던 방식은 야만적이었다. 긴 학교 가방 줄 없이 좋은 직장은 아니지만 열심히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삶을 엮어나갔던, 무한한 사랑을 주던 부모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답답하다는 생각까지 하게끔 했던, 그때를 나는 "야만의 시대"라고 부른다.  


시간이 지나 철이 들고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이 사라지고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 지금에서야 나는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어린 시절의 나를 반성한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어려운 생활에서도 사랑을 듬뿍 주셔서 진정 부끄러워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끔 깨우치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 나에게 사라지는 것을 만들었다.


그림책 <사라지는 것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엄마와 아이가 따뜻한 포옹을 하고 있는 따사로운 그림과 함께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고, 변하거나 사라져. 하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그리고 그건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영원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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