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울 일은 너무나도 많다.
그림책 읽은 후... 소복이 작가의 <왜 우니?>
비 오는 날 울고 있는 아이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로 우산을 씌어주고 있다. 울고 있는 아이 옆에 고양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우는 이유가 뭘까? 왜 울고 있을까? 자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없어 울면서 무작정 밖으로 나왔는지, 엄마한테 꾸중 듣고 비 오는 날 밖에 나와 벌을 서고 있는지, 아니면 친구와 놀다 싸워 속상한 일이 있었는지... 표지만 보아도 궁금하다.
나도 많이 울었다. 내가 갓난아이였을 적에, 엄마는 나를 하루종일 업고 지냈다고 했다. 내가 너무 울어서 나를 엄마 등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조금 커서 시골에 갔을 때, 가는 곳마다 마을 할머니들이 “울보 왔어?”, “애가 그 울보야?”라고 할 정도였으니, 동네에 잘 울기로 소문이 나긴 났었나 보다.
아주 아주 어릴 적에만 그랬겠는가. 내 기억에 나는 자라면서도 잘 울었다. 동네에서 놀다가도 울었고, 집에서 얘기하다가도 울었다. 왜 자꾸 우냐고 하면, 그것 때문에 또 울었다. 조금만 억울한 일이 있거나, 겁이 나거나, 혹은 나로 인해 누군가가 감정이 상하거나 피해를 입으면 나도 모르게 울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어른이 되고 직장을 다녔을 때도 나는 울었다. 화장실에서도 울었고, 사무실에서도 울었다. 울음을 참거나 그치려고 하면 꺼억꺼억 소리가 나서 더 티가 났다. 엄마가 되어서도 울었다. 아이가 너무 작아서, 그 조그마한 아이가 울어서, 작고 조그마한 아이가 아파서, 아이와 함께 나도 울었다.
그러다 내가 우는 걸 줄이게 된 건 둘째를 낳고 한 달쯤 지나서였다. 산후조리를 도와주시던 도우미 이모님이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하루 사이에 나는 첫째와 둘째를 함께 돌보아야 했다. 첫째는 순했지만 아직 네 살이었고, 둘째는 갓 세상에 나와 계속 울었다. 나는 지쳐서 저녁 6시면 우울해졌다. 어느 날 둘째가 계속 울어 나도 옆에서 엉엉 큰 소리를 내며 같이 울었다. 그때, 첫째가 조용히 걸어와 나를 꼬오옥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는 그때 깊은 위로를 받았다. 밖은 해가 져서 어둑해지고 있었다. 남편이 오려면 두 시간은 넘게 남은 시간, 점점 몰려오는 우울함과 나도 헤아릴 수 없는 두려운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치려 할 때, 나는 토닥토닥 네 살 딸의 가슴에 안겨 울었다. 울면서 나는 어린 딸에게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힘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어리지만 나를 지켜주는 이가 옆에 있음을 알고 든든해졌다. 그러면서 우는 일도 점점 없어졌다.
『왜 우니?』 속에는 정말 무수히 많은 우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울었던 이유이고,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망해서 울고,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질투심에 울고, 보이지 않는 것이 무서워서 울고, 옆 사람이 울어서 울고, 고마워서 울고, 꿈이 사라져서 울고, 나 자신에 실망해서 울고, 누군가가 너무 소중해서 운다.
울음은 내 감정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울 수 있는 사람이 좋다. 울 수 있는 사람은 담백하고 깔끔하다. 어쩌면 거짓되지 않은 이들이 잘 우는 것 같기도 하다. 간혹 우는 것을 참는 이도 있고,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 높은 지위에 있거나 책임질 위치에 있는 이들은 눈물을 보이는 것이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울라고, 울어도 된다고 얘기한다. 우는 것에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난 우는 이들을 칭찬한다. 우는 것은 전혀 큰일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우는 것은 화를 낼 일도 짜증 낼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라고 말한다. 울음이 그치고 감정이 추려지면 그만일 뿐이다. 울고 나서 더 단단해질 필요도 없다. 그냥 두면 된다. 우는 나 자신을 그냥 두면 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에게 큰 위로를 받고, 공감을 받으면 과거 울어야 했던 일들이 점점 괜찮은 일로 바뀐다. 네 살 내 딸의 토닥임이 있어 내가 울지 않아도 되었듯 말이다. 나는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이 참 좋다. 결국, 내가 아는 이든, 모르는 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받은 공감과 위로는 울음을 그치게 한다.
억수같이 내리던 비가 한 방울 토독하고 고양이와 울었던 아이 머리에 떨어진다. 비도 그치고 울음도 그쳤다. 지금은 그친 비가 다시 언젠가는 내리듯, 지금 그쳤지만 언제든 다시 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토닥토닥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없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한참 울고 나면 내가 나를 토닥였다는 걸 알게 되거늘.
이게 사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