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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Feb 25. 2024

비록 착각이라지만

그림책 읽은 후... 황인찬의 <내가 예쁘다고?>

책상에 앉아 고개 숙이고 뭔가를 하고 있던 밤톨머리 소년은 짝꿍 김경희의 목소리를 듣는다.

"되게 예쁘다"

소년은 깜짝 놀라며 자그마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생각한다.

"내가 예쁘다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떠들썩 거려도, 점심시간 식당으로 향하는 줄을 설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놀이터 정글짐에 올라가 놀 때도 자꾸만 생각난다.

"내가 예쁘다고?"

소년은 '설마'라고 의심하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하다가 이내 거울 속 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감을 하늘까지 높여본다.

예쁘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마음의 간지러움을 느껴보고 좋은 꿈도 꾼다. 기분이 그냥 좋다.


소년의 설렘에 괜스레 마음도 몽글몽글해졌다. 소년과 짝꿍 김경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도 모르게 응원의 목소리를 내뿜는다.

'예쁘다'는 말이 이렇게 예쁘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그림책에 분홍색으로 쓰인 "예쁘다"라는 글씨가 소년의 마음과 버무려져 설렘을 내뿜는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느꼈을 간지러운 마음과 "예쁘다는 게 뭐지?"라고 계속 질문하는 아이를 보니 '예쁘다'가 '사랑스럽다'는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사실 소녀 김경희가 예쁘다고 한 건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이 착각한 걸 알아차리고는 얼굴이 뜨겁고 귀도 뜨겁다. 부끄러워 김경희 옆으로 갈 수도 없다.

"내가 아니라니..."

슬픈 마음을 안고 운동장 벚나무 아래까지 달린다. 고개를 들어 분홍빛 꽃이 가득한 세상을 만나고서야 소년은 깨닫는다. "이게 예쁘다는 거였어"라고. 꽃은 아주 예뻤고, 소년의 기분도 조금은 좋아졌다.

소년의 머리 위에 분홍 벚꽃 잎이 떨어진 순간, 소년은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다.


소년은 비록 '착각'했지만, 그 사건으로 '예쁘다'의 의미를 더 확장할 수 있었다. '예쁘다'가 단지 얼굴의 생김새나 모양이 좋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흐드러지게 핀 꽃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살다 보면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나도 친절을 호감으로 착각하거나 배려를 좋아함으로 착각해, 내가 마치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 것이라 들뜨고 설레어하곤 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위 많은 친구들이 그랬었다. 소년처럼 하루 혹은 며칠 만에 "나만의 착각이었어"라고 알아차린 뒤, 현실을 직시하고는 이불 킥하며 소년처럼 얼굴을 붉히고 서운해하고 속상해했던 날들이 있었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무수한 착각들이 젊음의 시간을 채웠고, 착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던 마음이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소년이 착각으로 예쁘다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었듯, 젊은 시절 나와 친구들은 착각으로 삶의 추억들을 쌓아갔다. 누군가 착각했다는 것도 모른 채 살고 있다면, 기억은 아마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을 테다. 반면 상대는 누군가의 기억에 자신이 그런 존재로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누군가가 자신 주위에 있었다는 것 자체도 잊은 살고 있 거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만나고 접하는 사람과 감정에 모두 같은 기억이라는 게 존재할까 싶다. 


가끔은 착각을 알아차지지 못한 채, 착각 속에서 살고 싶기도 했다. 지금은 가능한 착각은 하지 않고 살고 싶다. 지금이야 '알아차린다 한들 뭐 어쩌랴'라는 대범함이 생겨서인 듯도 하다. 소년처럼 말 못 하고 얼굴 붉히고 달려 나가 예쁜 꽃을 보며 예쁨을 발견하는 순수함만큼이나 이제는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야, 난 네가 나보고 예쁘다고 한 줄 착각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 든 농염함 또한 충분히 가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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