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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화사한 향과 어우러진 구수한 커피 맛은 여느 카페의 핸드드립커피에 뒤지지 않았다. 맛이 좋다고 말하자 엄마는 오늘따라 진하게 내려졌다며 다시금 커피 잔을 들었다. 경진은 믹스커피를 버릇처럼 마시며 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으로 고생하던 엄마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얼떨떨했다. 공들여 골라 놓고 수십 년 동안 잊고 있었던 잔을 꺼내어 쓰다 보니 그에 걸맞은 새로운 취향과 여유까지 거머쥐게 되기라도 한 것일까? 살면서 커피를 통해 이토록 비현실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었고, 언니가 발굴해 낸 찻잔이 알라딘 요술 램프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 은모든,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해>, 민음사, 2020.
늘 마시던 커피믹스에서 핸드드립커피라니.
소설 속에서 몇 년 만에 만난 딸 경진은 엄마의 변화를 반가워하면서도 얼떨떨해한다.
'어떤 경우든 한결같이'라는 뜻의 "늘"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규정짓게 한다.
항상 그렇고 그런, 그래서 예측도 추측도 가능하다.
'늘' 안에는 한결같음을 이어오는 힘이 있지만, 한결같기에 느껴지는 지루함 또한 담겨있다.
늘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어제가 그제 같고, 오늘은 어제 같다.
분명 며칠 전이 8월의 시작이었는데, 오늘이 8월 마지막 월요일이 되어 있다.
빠른 시간은 매일의 시간이 늘 비슷해서 생긴다.
이럴 땐 변화를 주어야 한다.
매일 같은 머그잔에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오늘만은 찬장 문을 열고 의자를 놓고서는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사연 있는 잔을 꺼내서 그곳에 커피를 따르기만 해도 다른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다.
밥공기 대신 접시에 밥을 담고, 대접 대신 널찍한 머그잔에 국을 담으면 조금은 새롭다.
별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문 연김에 냉장고 정리를 해도 뭔가를 이루어낸 하루가 된다.
버스를 타고 낯선 곳에서 내려 새로운 동네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평소에 가지 않은 유명한 시장에 가서 시장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것도 특별한 날을 만드는 방법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가고 싶은 곳으로 저장해 놓은 곳을 친구와 같이 가려고 약속 잡고 큰 마음먹고 갈 이유는 없다.
오늘 오후에 시간이 되면 혼자서 가봐야지 하고 슬슬 움직이면 된다.
일상에 변화를 주는 것은 큰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변화는 어렵지 않다.
작은 변화가 늘 똑같았던 하루에 새로운 쉼표를 만든다.
나의 오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