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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화 Oct 02. 2024

<방망이 깎던 노인>과 <연필 깎던 창수 씨>

창수 씨와의 데이트

수필가 윤오영(1907~1976)이 쓴 <방망이 깎던 노인>을 오랜만에 읽어보았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수필인데, 그때도 재미있게 읽었던 글을 한 블로그에서 다시 만났다. 이 수필에는 그가 40년 전 동대문에서 만난 방망이 깎던 노인과의 일화가 눈에 그리듯 쓰여 있다. 작가는 며느리가 뜯고 있는 북어 자반을 보면서 40년 전 만났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생각했다. 나는 오늘 <방망이 깎던 노인> 수필을 읽고서 40여년 전 연필 깎던 창수 씨를 생각한다.  


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다양한 문구용품이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내 기억에 의하면 첫째인 언니의 초등학교 입학은 매우 중요한 우리 집 행사였다. 새 옷에, 새 가방에, 새 필통에, 새 연필에... 모든 새것이 언니 차지였다. 넉넉하지 않은 셋방살이 가운데 세 명의 자식 중 드디어 첫째가 학생이 되는 일은 부모님에게 기쁨이자 설렘, 잘 살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집에 연필이 굴러다니게 되었다. 그 굴러다니는 연필을 아빠는 도루코 문구용 칼(새마을칼)로 곱게 곱게 깎아 언니 필통에 넣어주셨다. 반지르르 부드럽게 깎인 나무와 뾰족하게 날 서있는 연필심을 보자면, 연필 하나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였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연필심 끝에서 정성이 뚝뚝 떨어진다.


2년 후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나에게도 필통과 연필이 생겼다. 창수 씨는 나에게도 도루코 칼로 연필을 깎고 연필심을 곱게 갈아 뾰족하고 가지런하게 다듬어진 연필 세 자루를 필통에 넣어주셨다. 아빠가 손수 깎은 연필은 나에게는 큰 자랑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연필을 아껴 쓰게 되었다. 쓰던 연필이 뭉툭해지면 새 연필을 쓸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였다. ‘이걸 쓰면 아빠가 또 시간을 내어 칼로 연필을 깎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보다는 곱고 고운 연필이 뭉툭해지는 게 어린 마음에도 너무 아까웠던 게 아닌가 싶다.


창수 씨는 우리 연필을 주말에 깎아주셨다. 언니 연필, 내 연필을 한데 모아 바닥에 종이를 깔고는 칼로 조심스레 손가락에 힘을 조절해 나무를 밀어내고, 그 결이 투박하지 않게끔 얇고 가늘게 깎아내었다. 아빠가 깎은 뾰족한 연필이 필통에 담기면, 쌀독에 쌀이 가득 담긴 것처럼 든든했다. 이렇게 아빠가 깎은 연필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시작했다.


내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서 나는 대부분의 친구네 집에는 연필깎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차모양이나 삼각형 모양의 샤파 연필깎이. 연필을 넣고 돌리면 빠르고 깔끔하게 연필이 깎여 나오는 신기한 물건. 친구네 놀러 가면 나는 필통을 꺼내고는 연필을 깎았다. 차마 부모님께 연필깎이 사달라고 조르지는 못했다. 연필깎이가 비싸보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창수 씨는 칼로 언니와 나의 필통에 담길 연필의 나무를 조금씩 조금씩 깎아 심이 길게 나타나게 했고, 심을 다시 쌰쌰쌱 갈아 뾰족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에 ‘후후~’하고 흑연을 털어낸 후 하나 둘 셋 자석필통 연필꽂이에 꽂아두셨다.


시간이 가고 우리 집에도 샤파 연필깎이는 아니었지만, 나름 쓸 만한 연필깎이가 들어왔다. 그 후부터는 아빠의 연필 깎는 모습을 만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아빠가 연필을 깎기 시작하면 언니와 나, 그리고 동생은 아빠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아빠가 연필 깎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한 자루 한 자루 완성되어 바닥에 내려놓으면, 각자의 자석필통을 채우며 기뻐했다.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40년 전의 일을 기억하며, 아빠가 손수 깎은 연필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사랑의 증표임을 지금에서야 발견한다. 연필은 창수 씨의 카빙 실력과 도루코 칼이 만들어낸 창작물이었다. 나는 그가 고사리 손으로 자신이 깎은 연필을 쥐고 언니와 내가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갈 것을 눈에 그리며 정성을 다해 곱게 깎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이가 들고 뭉툭해진 그의 손을 본다. 마치 아빠가 깎은 뾰족한 연필을 내가 오래 써 뭉툭하게 닳은 것 같다. 그의 손이 바로 연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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