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는 중국어로 “自行車(쯔씽처)”라고 한다. 해석하자면 ‘스스로 가는 차’이다.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자전거’를 ‘차’라고 부르는 것이 의아하기도 하고, 사람이 발로 굴러야 움직이는 그 물건의 속성을 잘 표현한 것 같기도 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니, 자전거는 차가 맞았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말이다. 여덟 살 전후였던 내 어린 시절, 우리 집 승용차는 바로 나의 아빠 창수 씨의 자전거였다.
창수 씨의 자전거는 제법 컸다. 그 이유는 발걸음보다 더 빠르고 수월하게 동네를 다닐 용도가 아니라 우리 집 생계를 위한 중요한 이동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자전거에는 자전거 의자 뒤편으로 짐을 올릴 수 있는 넓은 짐받이가 있었다.
아침이면 창수 씨는 짐받이에 커다란 상자를 차곡차곡 실었다. 무너지지 않게 차곡차곡. 상자 속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스카치테이프, 접착력이 좋은 청테이프, 흔치 않았던 양면테이프, 뚫린 그릇에 붙이는 은박테이프, 전기선을 감는 검정테이프 등 다양한 종류의 테이프들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을 덮어버릴 것처럼 많은 짐이 실린 자전거를 타고 그는 하루 종일 페달을 밟았다. 서울 방방곡곡 문방구와 철물점들을 들락 날락 하며 자전거에 실린 물건을 팔았다.
오후 네다섯 시가 되면 창수 씨는 상자 실은 자전거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자전거 뒤쪽 짐칸에는 아침에 나갈 때 물건이 가득 차 반듯하게 각이 져있던 상자가 한쪽이 움푹 꺼져있었고 상자의 개수도 줄어 있었다. 그가 밟은 페달의 수만큼 자전거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졌을 것이다.
많아야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나와 언니와 동생은 창수 씨가 집으로 돌아오면 늘 그와 함께 자전거 짐칸의 상자를 다시 집 안쪽으로 옮겼다. 그러면 창수 씨는 고사리손으로 아빠를 도운 우리들을 칭찬하며 동전 하나씩을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창수 씨 자전거에 있던 짐이 모두 내려지면, 자전거는 우리 모두가 탈 수 있는 자가용으로 변신했다. 넓은 짐받이는 엄마나 언니, 나나 동생이 조금은 빠르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승용차의 뒷좌석으로 바뀌었다.
나는 가끔 자전거 짐받이에 올라가 우뚝 서서 페달을 돌려줄 창수 씨가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아빠랑 갈 곳이 없을 때도 나 혼자 짐받이에 올라 우뚝 서 있기도 했다. 수없이 페달을 밟은 후 집으로 돌아온 아빠의 피곤함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어린 마음에 아빠가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어디론가 씽씽 달리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자전거 뒤편 짐받이에 두 손으로 받침대를 잡고 우뚝 서 있으면, 아빠가 구르는 자전거 페달에 맞춰 신나게 내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망토를 어깨에 둘러메고, 커다란 마법 봉을 바지춤에 꽂은 당당한 히어로로 변신하는 것이다. 페달을 구르는 그의 발이 빨라질수록 나는 바람결의 속삭임이 간지러워 내 세상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의 나로 되돌아왔다.
자전거 뒤편에서 수고로움 없는 편안에 흐뭇했던, 상상 가득한 내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던, 그때를 나는 추억한다. 창수 씨가 구르는 자전거 페달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기억 속 한 조각을 추억으로 만드는 시간 속에서 나는 세상 당차게 영차 영차 페달을 구르는 서른 조금 넘은 젊은 창수 씨와 그 창수 씨를 졸라 자전거 뒤편에서 히어로가 된 초롱한 눈빛의 나를 만난다.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자전거 뒤편에서 히어로로 변신하곤 했던 나의 곁에 자전거 페달을 구르며 나를 지키는 히어로가 존재했다는 것을.
히어로 부녀, 그와 내가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