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은우 Sep 30. 2021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세대(1)

미래세대(The Next Generation)

상대적 박탈감이 불러온 사회정의감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시니컬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기존 제도나 시스템, 기존 세대에 대해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어느 신세대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신세대의 특징일 수도 있다. 내가 속해 있는 X세대도 그렇고 이후의 밀레니얼 세대나 미래세대나 모두 마찬가지다. 그 이전의 세대에 대해 신세대는 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기에 미래세대가 시니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새로운 모습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보이는 시니컬함은 그 이전 세대가 보인 것보다 훨씬 더 강도가 크게 느껴진다. 앞서 언급한 현상들도 어쩌면 세상을 대하는 그들의 시니컬한 자세가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그렇게 시니컬해 보이는 걸까? 그 시니컬함의 정체는 뭘까?


미래세대의 시니컬함은 그들이 처한 환경과 그로 인한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취업부터 결혼, 출산, 육아, 자녀교육, 내 집 마련에 이르기까지 일생에 걸쳐 인간다운 삶을 사는 데 있어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족쇄가 채워진 사람들이다. 부모 세대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고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이 아니다. 손에 금수저나 다이아몬드 수저를 쥐고 태어난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지만 플라스틱이나 흙 수저를 쥐고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을 쥐어짜며 노력해 봐야 나아질 것이 별로 없다.



고생고생하며 어렵사리 열쇠를 손에 쥐어 하나의 관문을 뚫고 지나가면 다음 단계에 또 하나의 굳게 잠긴 관문이 나타나고, 그 관문을 뚫고 지나가기 위해서는 또 고생하며 어렵사리 열쇠를 찾아 헤매야 한다. 계층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 보니 그러한 환경에 놓일 수밖에 없는 미래세대는 세상살이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세상을 물려준 기존 세대에 대해 반감을 느끼게 되었고 기울어진 세상이 바로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환경적인 영향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반골의 기질이 유전자에 이식되어 있는 셈이다.


2017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걸었던 몇 가지 슬로건이 있다. 그중 한 가지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수없이 들었던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구호였다. 촛불 혁명을 통해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정부를 밀어내고 새로운 정부를 들어서도록 만드는데 앞장선 미래세대는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구호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 진흙투성이의 운동장을 달려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 그들은 문재인 정부가 내건 ‘균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에 대해 큰 희망을 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조금이나마 바로잡히고 진흙투성이의 운동장은 조금이라도 말라 마음껏 재능을 발휘하며 뛸 수 있기를 바랐다. 부모 도움 없이도, 가진 재산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고 안정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길 기원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철학적 차원의 정의 실현과 같이 거창한 개념은 아니다. 도덕적인 완성보다 그들이 원한 건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을 뿐이다. 대학에서는 의미 없는 취업 공부에 내몰리는 대신 마음 놓고 전공 공부를 할 수 있고 나름대로의 낭만을 즐길 수 있으며, 대학을 졸업하면 어렵지 않게 직장에 들어가 일한 만큼 돈을 벌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에 떨지 않고 정년까지 마음 놓고 회사 생활에 전념할 수 있고, 경제활동을 통해 결혼자금이나 육아비용, 더 나아가 내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수 있길 바랐다.


그것이 미래세대의 요구였고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상식이다. 엄마 아빠를 잘 만난 사람들은 고생하거나 힘들이지 않아도 ‘엄빠 찬스’를 이용하여 쉽게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잘릴 염려 없이 안정적으로 회사를 다니고,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부모들이 물려준 재산으로 20-30대에 40평 아파트에서 한량처럼 편히 먹고 지내는 사회가 아닌,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공정하게 기회를 부여받고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기대했다.



그들이 거창하게 도덕적으로 흠집 없는 국가를 원하거나 모든 국민이 부자가 되어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는 유토피아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비록 고생하더라도 고생한 만큼은 정당한 대가가 돌아오길 바랐을 뿐이다. 그들에게 닥친 문제들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이어져왔던 것들이기에 ‘균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를 내세운 문재인 정권에 의해 그 잘못들이 바로잡히길 바랐을 뿐이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이 실현됨으로써 자신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뒤떨어질 수밖에 없게 만든 성공의 사다리를 다시 바로 세우고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 ‘정의’나 ‘공정’에 큰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정의로운 사회, 공정한 사회가 되면 그들의 삶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초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기대는 폭발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인천국제공항을 찾은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메시지는 그가 말한 공정함을 실현하는 기폭제가 될 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는 사회의 모든 분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어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인상되는 등 변화가 나타나자 젊은 세대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정말 공정한 사회가 열리는 계기로 여기고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정하지 않은 일이 생겼는데,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화시킴으로 해서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수년 동안 고생한 노력들이 일시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대적 허탈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우리 첫째 아이는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어 한다.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사범대를 가야 하지만 아쉽게도 아들은 일반 수학과로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학교 1,2학년 성적이 과에서 2등 안에 들 경우 임용고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이는 대학 1,2학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공부했다. ‘힘들게 들어간 대학인데 1,2학년 때는 좀 놀아가면서 해’라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무서울 정도로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매일 새벽 3, 4시까지 아이의 방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임용고시 자격을 획득했고 코로나로 인해 학생들이 없는 와중에도 교생실습을 마치고 60시간이지만 실제로는 180시간이 넘는 봉사활동까지 마무리했다. 졸업을 앞두고 임용고시에 응시를 했으나 불합격되어 다시 1년을 더 공부하고 있다. 교사가 되는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그 아이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쉽게 대학을 다니고 너무나 쉽게 취업을 했던 내 입장에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안타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대학시절 내내 학업에는 관심 없이 실컷 놀다가 시험도 안 보고 계약직 사무보조 교사로 들어온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아들과 동일한 자격을 가진 교사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아이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대학 4년, 그리고 졸업 이후에도 그렇게 기를 쓰고 죽어라 공부한 걸까? 그냥 대학생활 편히 하다가 계약직으로 들어가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고 떼를 쓰면 될 텐데 말이다. 허탈함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일들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직원들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집단적인 힘을 이용하여 정규직을 요구하고 있고 힘없는 개인들은 이기주의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대놓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도 못한 채 숨을 죽이면서도 상대적인 억울함과 박탈감에 속이 뒤집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문재인 정권을 향해 공정을 기대했건만 오히려 공정이 왜곡되고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자 젊은 세대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공정’과 ‘정의로움’에 큰 기대를 걸었던 나도 실망이 크다.


노력에 대한 상식적이고 정당한 대가를 받길 원했던 젊은 사람들의 기대가 자신들이 원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가고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자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더욱 커졌고 지지하던 정권에 대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조국 전 장관의 자녀와 관련된 사생활 문제가 터져 나오자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공정함을 기대했던 정권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 젊은 세대의 자괴감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하여 대통령이 약속한 말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이 현안으로 대두되자 세상이 얼마나 불공정한지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일들을 계기로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사람들의 냉소는 깊어졌고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연일 헛발질을 일삼는 문재인 정권을 향해 ‘재앙’이라며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젊은 사람들도 많다. 이렇듯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은 상대적으로 사회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불공정한 사회에서 그나마 공정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욕구를 사회 구석구석에서 불공정한 요소들을 찾아내기 위해 불을 켜고 살펴보는 것으로 분출하게 만들었다. 결국 미래세대가 보이는 시니컬함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가 불공정과 관련되어 있는데 자신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극복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져서 나타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모두 pixabay.com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단, 그래프는 직접 만든 것이며 따라서 인용할 경우 허락이 필요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