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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Feb 24. 2019

언어의 품격

난 나이가 부끄럽지 않은 말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동네 아파트 단지에 낯익은 외국인 남자가 하나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이와 함께 산책을 하는 동안 꽤 자주 마주친 데다 외국인이 별로 없는 동네인지라 쉽게 낯을 익힐 수 있었다. 예닐곱 살 그리고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과 한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가 있는데, 아이들이 한국말을 꽤 잘 하는 걸 보아 한국에 정착하여 사는 듯했다.  


오늘도 이슬이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남자를 만났다. 평소와 달랐던 것은 그 남자의 옆에 낯선 두 여인이 있었다는 것인데, 한 사람은 한 눈에 보아도 남자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독일어로 추정되는 언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유럽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 남자의 아내인듯한 여자와 낯익은 아이들이 따르고 있었다. 아마도 남자의 모국에서 어머니가 다니러 온 듯하고 가족끼리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는 모양이었다. 


남자의 가족들이 지나간 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 명의 노파들이 지친 다리를 쉬려는 듯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 한 노파의 말을 듣게 되었다. 

“외국 사내들이 결혼한 한국 여자들은 죄다 쳐지고 션찮아.”

남자의 아내인 한국인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뭔 말이야?”

일행 중 다른 한 노파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처음 말을 꺼낸 노파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서양 사내들이 결혼한 한국 여자들 보면 죄다 나이 들고 못생겼더라고.”

이후 누군가의 입에서 동조하는 말이 흘러나오고 그 서양 남자와 그의 아내에 대한 적나라한 '품평'이 이어졌다. 다행히 그 외국인 가족과의 거리가 꽤 멀었던 탓에 당사자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노파들이 주고받는 말은 험담 일색이었다. 그들의 말을 듣는 순간 난 너무 놀라서 반사적으로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파들은 어림짐작으로 70세 전후의 나이쯤,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온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내가 지나가는지, 그리고 내가 쳐다보는지도 모른 채 외국인 남자와 그의 아내를 헐뜯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파들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pixabay.com]


남자의 아내가 아이들의 연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아 보이기는 하였다. 게다가 상당히 마른 편에다 꾸미지 않아서 그런지 그리 예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노파들로 하여금 남자와 그 아내를 이유 없이 싸잡아 비난하도록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노파들이 무슨 자격으로 아무 관련도 없는 그 외국인 남자와 그의 아내를 헐뜯는단 말인가? 그들 앞을 지나며 난 불쾌감에 저절로 혀가 차졌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귓전을 울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심기가 불편해졌다. 가급적 빨리 그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벗어나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산책 나온 다른 개를 만나게 되었다. 이슬이는 성격이 소심한 탓에 다른 개를 만나도 쉽게 접근하질 못한다. 마침 상대편 개도 그러한 성격을 가졌는지 두 녀석 모두 다가가지는 못하고 멀찍이 떨어진 채 서로 탐색전만 펼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느새 다가왔는지 조금 전의 그 노파들이 지나가면서 한 마디 던졌다.

“붙어봐라, 붙어봐. 누가 이기나 보게.”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하마터면 그 노파들에게 한 마디 던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충동을 눌러 참았다. 한 마디 해봐야 본전도 못 건질 것이 뻔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멈춰 서서 일부러 시간의 틈을 두었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모처럼 환한 햇살이 내리쬐는 늦겨울 오후의 상큼한 정취를 그 불쾌한 냄새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입을 통해 내면의 향기를 분출한다. 그렇다면 나에게서는 어떤 향이 날까? pixabay.com]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향을 가지고 있다. 그 향은 입을 통해 발산되기에 한 사람이 쓰는 말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향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입만 열면 거친 말과 욕을 쏟아내는 바람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뜻하고 편안한 말로 허브같은 향을 발산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가정환경이나 성장 배경, 그들의 교육수준이나 사고수준, 그리고 가치관 등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말에는 한 사람이 걸어온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애써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사람의 내면세계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도록 만든다. 그러니 입을 열 때마다 사람은 자신의 은밀한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 남자와 그 아내를 이유 없이 비난한 그 노파들의 경우, 필경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음이 틀림 없다. 이미 칠십 세 근방에 이른 분들이니 자식이나 손주들도 많이 있을 터였다. 그들에게 물으면 자기 자식, 자기 손주들을 끔찍이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껍데기일뿐,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는 법. 그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다. 유럽이 고향인 남자가 머나먼 한국 땅까지 와서 가족을 이루고 살 정도라면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음이 분명할텐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노파들이 이해하는 사랑의 범주는 기껏해야 팔이 안으로 굽듯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만 아끼고 귀하게 대하는 것임이 틀림 없다. 70년 넘는 세월을 살면서 사랑은 상대방이 가진 모든 단점들을 뛰어넘어 포용할 수 있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그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한 사람이 쓰는 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가치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배우지 못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배움의 문제는 아니다. 교양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먹고사는 게 고단하여 배우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배우지 못했음에도 나이 들어가며 말이 순화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이 듦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의 말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도 있다. 비록 젊었을 때는 젊음의 혈기로 거침 없이 내뱉었던 말들도, 삶의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더욱 많은 거름장치를 거쳐 입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묵으면 묵을수록 자극적인 독소는 빠져나가고 깊은 맛이 나는 된장처럼,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인생의 깊은 맛이 우러나는 말 습관을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이 든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말처럼 보기 안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향기 나는 사람이 되고 싶건만, 이번 생은 틀린 듯.... pixabay.com]


문득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나 역시 오십이 넘는 나이를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험담하기도 했고, 말로 사람들을 아프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과연 그 노파들을 비난한 자격이 있는 걸까? 내가 내뱉은 말이 그 노파들이 내뱉은 말 만큼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내뱉은 말의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린 사람들도 많을 텐데, 늘 향기나는 말만 써 왔다고 우길 수 있을까? 행여나 상처주는 말을 했더라도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고 우긴다 한들, 내가 내뱉은 말들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나이 들어가면서, 적어도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나이가 부끄럽지 않은 것이어야 할 텐데 과연 난 내 나이에 걸맞은 말 그릇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노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언어습관을 되돌아보았다. 인품은 언품에 의해 완성되거늘, 과연 사람들은 내가 내뱉는 말을 듣고 나의 인품을 어떻게 평가할까? 내 스스로를 돌아보며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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