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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Feb 17. 2019

가난한 시절이 그리워지는 이유

잃어버린 공간과 사람에 관한 추억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추억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초등학교 친구들과는 조개탄을 피운 난로 위에 김칫국물이 벌겋게 스며든 도시락을 데워 먹던 이야기며 수업을 하다 말고 산불을 끄기 위해 뛰쳐나갔던 이야기를, 조금 더 커서 만난 친구들과는 기차 뒤쪽에 탄 다른 학교 여학생들을 향해 창문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휘파람을 불던 수학여행 이야기와 선생님 몰래 자율학습을 빼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일탈을 즐기던 이야기 등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곤 한다. 그럴 때면 어찌나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다들 그때가 그립다고 한다. 


지나간 일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종종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며 애잔한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응답하라 19XX’라는 이름의 드라마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 하나도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간혹 나이 어린 사람들도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그때가 좋았다고 하지만 나이 든 사람들일수록 옛날의 기억을 그리워한다. 그때가 좋았다며 그 시절의 추억을 되짚어보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 시절이 살기 좋았을까? 


[가난하기만 했던 그 시절이 눈물 나게 그리운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출처: tvN]


나의 어린 시절은 우리집을 비롯해 주위 사람 모두가 다 가난했다. 쥐가 들끓는 손바닥만 한 판잣집에서 온 가족이 부대끼며 지내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수도가에서 물로 배를 채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맛난 간식은 구경하기도 어려웠고 밥조차 배불리 먹기 힘들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며, 내일은 무엇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산다는 것이 막막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린 시절은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 부담이 없었기에 마냥 그립기만 하지만, 만약 나의 부모 세대 사람들에게 물어도 그때가 그립다고 할까? 가난이 마치 그림자처럼 지긋지긋하게 몸에서 떨어지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리라 확신한다. 오히려 물질적으로는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까?


난 그 이유를 공간에서 찾는다. 공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난 서울에서 낳고 자랐지만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아파트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집이 낮은 지붕과 마당을 가진 단독주책이었다. 모든 집의 대문은 열려 있었고 친구를 찾아, 혹은 어머니가 접시에 담아준 음식을 들고 이웃집을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 모든 이웃이 친척이었고 온 동네가 하나의 공동체였다. 


그 시절에는 주위의 모든 곳에 빈 공간이 차고 넘쳤다. 우리는 집을 벗어나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발 닿는 곳 어디에나 산이 있었고 개울이 있었고 들이 있었으며 곳곳에 빈 땅이 널려 있었다. 그곳에는 메뚜기나 잠자리도 있었고, 개구리도 있었으며, 야생동물들도 있었다. 밤이 되면 소쩍새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도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꽉꽉 채워 놀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공간의 제약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온 동네, 그리고 발 닿을 수 있는 어느 곳이나 모두 놀이터가 되었다. 시간의 제약도 없었다.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학원을 갈 일도 없었고 목숨 걸고 입시공부에 매달릴 일도 없었다. 사방에 널린 공간 속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모든 공간 속에는 항상 친구들이 함께 했다.

 

[집을 나서면 마주치는 모든 공간들이 놀이터였다. 출처: pixabay.com]


공간은 추억이 쌓이는 곳이다. 지나간 시간의 추억은 공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공간이 넓고 많다는 것은 만나는 사람도,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공간의 넓이는 추억의 깊이를 좌우한다. 공간의 넓이가 넓을수록 쌓이는 추억도 많게 마련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살기 좋았다고 느껴지는 건 질적으로 풍부해서가 아니라,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되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든 추억들은 우리가 살던 주변의 공간을 통해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공간을 잃어버렸다. 마당조차 없는 좁은 아파트가 전부이다.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라고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한 손바닥만 한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이 전부이다. 산도 사라지고 들도 사라지고 개울도 사라졌다. 그곳에 있던 메뚜기나 개구리, 야생동물들도 사라져 버리고 없다. 천적이 사라진 매미들만 귀가 따갑게 울어댄다.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도 없고, 탐험해야 할 미지의 세계도 없으며, 관찰해야 할 자연도 없다. 오로지 비좁은 아파트와 학교 교실을 오갈 뿐이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거실에서 지내는 일도 없다. 오로지 두 평도 안 되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하루를 보낸다. 기껏 집을 벗어나 봐야 노래방을 가거나 분식점을 떠도는 게 전부다.


공간이 사라지면서 공간을 함께 채울 친구들도 줄어들었다. 오픈된 공간에서는 낯선 아이들조차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지만 폐쇄된 공간에서는 그 관계가 지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좁은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친한 친구 몇 명 만이 추억을 함께 할 뿐이다. 그러니 간직해야 할 추억도 그만큼 줄어들고 말았다. 공간을 뛰어놀던 기억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IT 기기들이 대체하고 말았다.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금 아이들도 성인이 되면 지나간 시간들을 그리워할까? 출처: pixabay.com]


어른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도 과거의 추억은 남아 있지만 그 추억이 담긴 공간은 사라지고 없다. 공간이 사라지면서 공간을 함께 채웠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과의 관계는 끊어져 버리고, 옛날만큼의 새로운 추억도, 새로운 관계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공간이 남아 있다면 지금보다 못 살았던 옛날이 그립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가난한 시절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우리 주위의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함께 채웠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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