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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Feb 03. 2019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 아니라 망각의 동물

늘 후회하지만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고 마는...

우리 집에는 이슬이라는 이름을 가진 반려견이 살고 있다. 검은색 미니 푸들인데 어느 사이 만으로 열두 살이 넘었다. 사람으로 치면 꽤나 고령이 된 셈이다. 이젠 나이가 있다 보니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매년 건강검진을 해야만 안심이 되기에, 설 연휴가 시작되기에 앞서 이슬이의 종합검진을 했다. 


나이가 있다 보니 매년 검진 결과에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작년 이맘때 까지만 해도 건강검진 수치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는데 올해는 달라진 것이 많이 보인다. 글로불린과 간 기능의 악화를 나타내는 수치가 높아졌다고 한다. 무언가 몸 안에 염증이 있으면 이 수치가 올라갈 수 있다고 하는데 초음파 검사를 해봐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한다. 어딘가 안 좋은 곳이 있긴 하나 그곳이 어딘 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하기만 하다. 게다가 호르몬에도 이상 증후가 보인단다. 초음파로 보니 부신이 많이 커져 있다. 결국 설이 지나고 나서 호르몬 검사와 혈액 검사를 다시 하기로 했다. 병원만 가면 부들부들 떠는 겁 많은 아이인데 또 스트레스를 받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한 껌 하는 이슬이. 비록 나이 들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슬이는 최강 동안을 자랑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슬이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둔해졌다. 예전에는 밖에 나가자고 자주 졸라대던 아이가 산책을 가자고 해도 시큰둥한 모습을 보인다. 밖에 나가서도 겨우 2-30분만 걷다 마는 게 전부다. 산책코스도 예전의 1/5 거리로 줄어들었다. 달리기를 할 때면 늘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건만, 이제는 마음만 급할 뿐 달리지를 못한다. 애꿎은 인형을 붙잡고 씨름을 하던 모습도 사라지고 이제는 하루 종일 잠만 잔다. 해가 바뀔수록 이슬이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니 내년 이맘때쯤이면 어떤 모습일지 불안하기만 하다.  


조금씩 달라지는 이슬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같이 하겠노라 다짐하곤 한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놀아주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산책을 하고, 조금이라도 더 안아주려고 한다. 화사하게 꽃이 피는 봄이거나, 시리도록 단풍 지는 가을이면 한 장이라도 더 이슬이와 함께 한 사진을 남기려 노력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지나는 시간이 안타깝고 아쉬워 어쩔 줄 모르겠으면서도, 하루가 지날 때쯤 되돌아보면 이슬이와 함께 한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니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이슬이 곁에 있어 주겠다는 마음은 그야말로 다짐일 뿐, 실제로는 늘 무언가를 하느라 같이 있어주질 못하고 이슬이 혼자 내버려두는 시간이 많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이슬이는 혼자 정신없이 코를 골며 잘 뿐, 여전히 난 이슬이 옆이 아닌 PC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이슬이와 산책할 봄날이 그리워진다]

       

이슬이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 아니라 망각의 동물이 아닐까 하는.... 지나고 나면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더 같이 하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어리석게도 다음 날이 되면 또 할 일에 치여 이슬이에게 소홀해지고 만다. 그렇게 다짐하고 후회하고, 다짐하고 후회하기를 반복한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이슬이만 데리고 있을 수도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지만, 그러다 보면 또 어느 사이엔가 이슬이는 훌쩍 달라져 있다. 


이슬이의 어릴 때 모습을 떠올려 보지만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손바닥보다 작은 모습으로 아장아장 걷다가 혼자 넘어지던 때가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지만, 안타깝게도 성장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내 기억 속서 이슬이의 어린 시절 기억을 송두리째 잘라낸 후 아기 때의 모습과 나이 든 시절만 연결해 놓은 듯하다. 어느새 이렇게 나이가 든 건지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조금 더 남아 있지 않음이 아쉽기만 하다.  


가끔은 이슬이가 말을 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럴 때 물어볼 수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슬아, 너는 아빠가 많이 못 놀아줘서 섭섭하니?"

이슬이는 뭐라고 대답을 할까?  

"아니에요, 아빠. 아빠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저는 아빠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고마워요."

이슬이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으니 말이다.


내일이면 또 후회할 줄 알면서도 난 오늘도 또 다짐을 한다. 내일은 조금 더 이슬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겠다고. 더 많이 놀아주고, 더 많이 산책하고, 더 많이 안아주겠다고. 올 겨울도 지독하게 추웠지만 이제 한 달 남짓만 지나면 햇살도 화사해지고 온갖 꽃들이 지천에 피어나겠지. 올해도 이슬이를 데리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이슬이와 함께 한 시간들을 기억 속에 꼭꼭 눌러 담으려고 한다. 나 역시 세월의 힘을 거스르지 못해 기억의 질이 현저하게 나빠지고 있지만, 그래야 이슬이가 나이 들어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덜 섭섭할 테니까 말이다. 


[나이 들면서 종양이 많아지는 바람에 한 차례 수술을 했다. 더 이상 아프지 말기를...]


하지만 그것도 한낱 지키지 못할 다짐이 될까 염려스럽다. 그때가 오면 난 또 다른 핑계를 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곤 또 후회를 하겠지. 어디 이슬이뿐이랴. 부모님, 그리고 나의 아이들, 그들에게 난 어쩌면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늘 조금 더 시간을 같이 보내야지, 조금 더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가져야지, 조금 더 옆에 있어야지, 조금 더 자주 전화를 해야지 다짐을 하지만,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시간은 깨진 독에 담긴 물처럼 흔적 없이 빠져나가고 난 후이다. 이슬이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지 않듯 아이들의 어린 시절도 이제는 아련하기만 한데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은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전화 한 번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이, 어머니는 어느 사이 팔순을 넘기고 말았다. '어어'하는 사이에 어느새 내 주위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그렇게 멀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실수로부터 배우고 그로부터 발전해나가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같은 후회를 반복하면서도 도무지 달라지지 않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련히 잘 지내겠지, 그리고 언제나 내 곁에 있겠지.... 그렇게 방심하다 어느 날엔간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이슬이와의 이별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지만, 난 오늘도 이슬이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많다. 그런 걸 보면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기보다 어쩌면 망각과 후회의 동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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