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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은우 Jan 27. 2019

인덕(人德)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덕 있는 사람인가?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을 알게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교류가 전혀 없었던 친구였다. 조용히 앉아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던 나에 반해, 그 친구는 학창 시절 학교를 나오는 날보다 빼먹는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자신은 삶의 자유와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항변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는 탈선을 밥먹듯이 하는 불량학생일 뿐이었다. 아마도 학창 시절이었다면 이 친구와 어울릴 일이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들어선 입장에서 굳이 젊은 시절의 행태를 들춰내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다. 틀에 박힌 채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나의 삶이 그의 삶보다 더 뛰어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주로 동문회 등의 공식적인 모임에서만 얼굴을 볼뿐이었지만, 가끔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도 그 친구를 초대했다. 


그러던 중 술자리에서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고 술에 취한 이 친구로 인해 많은 친구들이 위험에 빠질 뻔한 일이 생겼다.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마무리가 되긴 했지만 그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마음이 꽤나 불편했다. 다음 날, 그 친구에게 전날의 상황이 편치 않았으니 조심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자신은 평생 지지리 인덕도 없이 살아왔는데 충고하고 조언해주는 친구가 있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다. 인덕 없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선뜻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걸 좋아할 리 없을 텐데, 살아오면서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면 그 친구의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인덕 없다는 그의 말이,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만 탓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러나 친구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곧이어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되어 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평생 지지리 인덕도 없이 지냈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나 역시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난 늘 사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살았다. 왜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이 없을까? 왜 내 주위에는 날 끌어주는 사람이 없을까? 왜 내 주위에는 날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까?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돌아보면 내 삶은 참 퍽퍽했던 것 같다. 대학을 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미국 유학을 갈 때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 이직을 할 때도,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경제적 절벽 앞에 마주친 백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을 때도, 그 어느 한순간도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든 일들을 쉽게 쉽게 풀어가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그들 주위에는 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었건만, 나는 늘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쯤 되어서야 희미하게 출구가 보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내 머릿속에서는 '인덕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인덕 없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문득 내가 그토록 힘들게 살아야 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 인덕 없도록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난 사람들에게 그리 편한 존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만성적인 수면장애로 인해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조울증마저 있어 사람들을 일관성 있게 대하지 못했으며, 부정적인 성격 탓에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고 지치게 만들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많았지만 변덕 심한 내 성격 탓에 그들과의 관계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까칠한 성격 탓에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칼같이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늘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늘 내 편리만 주장하고, 늘 내 주장만 옳다고 여겼고, 나는 흐트러지면서도 상대방의 흐트러진 모습은 조금도 용서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관대했지만 상대에겐 늘 빡빡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내 주위에는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의 무게를 나눌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힘겹긴 해도 내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도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들어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미국 유학을 갈 때도, 이직을 할 때도, 백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책을 출판할 때도, 내가 지지리 인덕도 없다고 한탄하는 모든 순간에도 생각해 보면 늘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그 모든 일들을 결코 이루지 못했거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 삶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쳐 쓰러졌을 때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없이 내가 이룬 일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얻은 모든 성과들이 100% 나 혼자만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내 노력이 90%였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10%를 채워준 사람들이 없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게 인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게 주어진 인덕을 깨닫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친구와의 일을 통해 나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덕은 타고난 환경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인덕이 없다고 느낀 건 실제로 인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 내 주위에 좋은 사람, 진실한 사람,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건만, 내가 그들을 힘들게 했거나 그들이 내 곁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지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음을. 어쩌면 내가 제풀에 지쳐, 아니면 변덕 때문에 그 사람들을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인덕’ 혹은 ‘인복’이라는 말을 쓴다. ‘난 참 인덕이 많은 사람이야’라며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난 참 지지리 인덕도 없어’처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부정적 맥락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하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은 쉽사리 자신의 인덕이 부족함을 탓한다. 물론 타고나는 건 있을 게다. 부모나 형제는 내가 노력해서 만든 관계가 아니니 그건 어쩔 수 없이 타고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힘겨운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으니 만인이 공평한 건 아니다. 하지만 부모나 형제를 뺀 그 외의 모든 인덕은 살아가면서 내가 만드는 것임도 잊어서는 안 될듯싶다.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인덕이 없다고 생각되거든 자신의 행동거지를 곰곰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준 존재였는지 말이다. 어쩌면 인덕이 없다는 말은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지 못하는 존재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신세한탄 대신 조금 더 인간관계에 대해 노력하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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