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덕 있는 사람인가?
우연히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을 알게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교류가 전혀 없었던 친구였다. 조용히 앉아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던 나에 반해, 그 친구는 학창 시절 학교를 나오는 날보다 빼먹는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자신은 삶의 자유와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항변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볼 때는 탈선을 밥먹듯이 하는 불량학생일 뿐이었다. 아마도 학창 시절이었다면 이 친구와 어울릴 일이 없었을지 모르겠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들어선 입장에서 굳이 젊은 시절의 행태를 들춰내 거리를 둘 필요는 없었다. 틀에 박힌 채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던 나의 삶이 그의 삶보다 더 뛰어난 것도 아니니 말이다. 주로 동문회 등의 공식적인 모임에서만 얼굴을 볼뿐이었지만, 가끔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도 그 친구를 초대했다.
그러던 중 술자리에서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고 술에 취한 이 친구로 인해 많은 친구들이 위험에 빠질 뻔한 일이 생겼다. 다행히 별 사고 없이 마무리가 되긴 했지만 그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 마음이 꽤나 불편했다. 다음 날, 그 친구에게 전날의 상황이 편치 않았으니 조심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 친구가, 자신은 평생 지지리 인덕도 없이 살아왔는데 충고하고 조언해주는 친구가 있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다. 인덕 없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선뜻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는 걸 좋아할 리 없을 텐데, 살아오면서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면 그 친구의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닌가? 인덕 없다는 그의 말이,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만 탓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그러나 친구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곧이어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되어 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평생 지지리 인덕도 없이 지냈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나 역시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난 늘 사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살았다. 왜 내 주위에는 좋은 사람이 없을까? 왜 내 주위에는 날 끌어주는 사람이 없을까? 왜 내 주위에는 날 도와주는 사람이 없을까?
돌아보면 내 삶은 참 퍽퍽했던 것 같다. 대학을 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미국 유학을 갈 때도, 어느 정도 경력이 쌓여 이직을 할 때도,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경제적 절벽 앞에 마주친 백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책을 내고 강의를 하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을 때도, 그 어느 한순간도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든 일들을 쉽게 쉽게 풀어가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그들 주위에는 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누군가가 있었건만, 나는 늘 힘들고 지쳐 쓰러질 때쯤 되어서야 희미하게 출구가 보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내 머릿속에서는 '인덕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인덕 없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문득 내가 그토록 힘들게 살아야 했던 이유는 나 스스로 인덕 없도록 행동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난 사람들에게 그리 편한 존재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만성적인 수면장애로 인해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조울증마저 있어 사람들을 일관성 있게 대하지 못했으며, 부정적인 성격 탓에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고 지치게 만들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많았지만 변덕 심한 내 성격 탓에 그들과의 관계도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까칠한 성격 탓에 나와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은 칼같이 관계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늘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늘 내 편리만 주장하고, 늘 내 주장만 옳다고 여겼고, 나는 흐트러지면서도 상대방의 흐트러진 모습은 조금도 용서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에겐 관대했지만 상대에겐 늘 빡빡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늘 내 주위에는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삶의 무게를 나눌 사람들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힘겹긴 해도 내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도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학을 들어갈 때도, 취업을 할 때도, 미국 유학을 갈 때도, 이직을 할 때도, 백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책을 출판할 때도, 내가 지지리 인덕도 없다고 한탄하는 모든 순간에도 생각해 보면 늘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그 모든 일들을 결코 이루지 못했거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 삶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쳐 쓰러졌을 때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 없이 내가 이룬 일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얻은 모든 성과들이 100% 나 혼자만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록 내 노력이 90%였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10%를 채워준 사람들이 없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게 인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게 주어진 인덕을 깨닫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친구와의 일을 통해 나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덕은 타고난 환경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내가 인덕이 없다고 느낀 건 실제로 인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 내 주위에 좋은 사람, 진실한 사람, 날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내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건만, 내가 그들을 힘들게 했거나 그들이 내 곁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지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음을. 어쩌면 내가 제풀에 지쳐, 아니면 변덕 때문에 그 사람들을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인덕’ 혹은 ‘인복’이라는 말을 쓴다. ‘난 참 인덕이 많은 사람이야’라며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난 참 지지리 인덕도 없어’처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부정적 맥락에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하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은 쉽사리 자신의 인덕이 부족함을 탓한다. 물론 타고나는 건 있을 게다. 부모나 형제는 내가 노력해서 만든 관계가 아니니 그건 어쩔 수 없이 타고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힘겨운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있으니 만인이 공평한 건 아니다. 하지만 부모나 형제를 뺀 그 외의 모든 인덕은 살아가면서 내가 만드는 것임도 잊어서는 안 될듯싶다. 누굴 탓할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인덕이 없다고 생각되거든 자신의 행동거지를 곰곰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어준 존재였는지 말이다. 어쩌면 인덕이 없다는 말은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덕을 베풀지 못하는 존재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신세한탄 대신 조금 더 인간관계에 대해 노력하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