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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발령 20주년(무늬가 남은 숙취)

by 하니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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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방향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틀째 생각이 많은 나.

어제는 금요일마다의 재활 치료도 제꼈다. 생각의 폭발이 일어나면 일상의 영위가 불가한 나다.

오후 출근 후에는 일탈이 불가했다. 바쁘게 나를 돌려 세웠다.

어제는 약속이 세 개가 겹쳤다. 하나는 대학 친구들, 하나는 사무실 친구들, 하나는 9급 초임 발령 동기들.

내 선택은 그냥 쉽게 딱 하나.

대학 친구들은 다음에 보면 되는건데 사무실 직원 6인과의 킨텍스 캠핑장 1박 불참은 못내 아쉽다.

나는 싸가지가 바가지인 놈이라 '야. 나 요새 여기서 니네랑 노는 건 재미가 없어. 나 술도 안 마시잖아'를 반복했지만 닝겐들은 나를 원했고 나도 안타까웠다. 술을 안 마셔도 그 놈년들은 싹퉁 바가지의 저렴하고 솔직한 이빨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2005년 4월 13일에 서대문 세무서에 발령 받았다. 나까지 5명.

어제는 '국세청 초임 발령 20주년 기념 파티일'이었다.

5명 중 한 명은 제꼈다. 세무사를 따서 나가 승승장구하는 머니 뱀파이어는 버렸다. 정확히는 그녀가 우리를 버렸다. 그 친구는 본인의 가족상에 우리 중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그 아이는 동기들한테는 부고를 알리지 않고 내 마누라한테만 알렸다. 그 무렵 도움 받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세무서 동기들은 그 당시 서대문 세무서 5인방을 부러워했다.

모두 정이 넘치는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이빨러가 있었고 지갑의 두께를 가늠하지 않는 동기들 중 제일 착한 형님이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서너번씩 부어 댔고 20년간 꾸준히 만남을 이어간 우리는 날짜를 벼리고 다져 어제 모였다.

270명의 동기들 중 이렇게 초임 세무서 멤버 단위로 모여 20주년을 기념 파티를 여는 것은 우리네가 유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 확실하다.

우리는, 나는 서울, 큰 형님은 전라도 광주, 나와 동갑 놈은 대구, 두 막둥이들은 경주와 제주도 출신이었으니 그야말로 전국구 오방색이었다.

국세 공무원 교육원에서 각자의 궤도에서 맴도느라 바빴던 우리는 저녁과 밤을 이어대며 신속하고 깊이 서로의 그럼다움을 나누어갔다. 모두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으며 적적했기에 그리 값 비싼 시간들이 아니었다.

큰 형님은 정말 착했다.

말수는 적었지만 함께 술자리를 함께한 모든 사람들의 택시비를 챙겨주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지갑보다 훨씬 마음이 두꺼운 천사 형. 잘생기기까지한 매너왕 큰 형님과 발랄한 두 막둥이 여동생들 덕에 우리 동기들은 세무서 내에서도 금세 견고한 오각 블럭이 되었다. 서울청, 중부청 동기들 사이에서도 우리서 동기들의 단합력은 유명했다.

나와 동갑 놈은 조금 조용했다.

지나가는 여자를 훔쳐보지 않고 대놓고 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별명이 '부담 보이'였다. 착함은 기본이었고 말수는 적었지만 유머와 넉살이 있었다.


막내는 속이 깊었다.

3남매 중 막내 였고 위로 나이 차가 큰 오빠가 둘인지라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났고 말투는 툭툭이었지만 마음을 연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도 단단한 자신의 깊은 따뜻함을 구체적으로 나눠줄 줄 아는 큰 사람이었다. 든든한 막냉이 역할을 잘 했다. 다른 서에 있던 나이 차가 꽤 크던 동기형이 막내를 보러 우리가 마시던 술자리에 자주 등장했고 그 둘은 몇년 뒤 결혼 했다. 형님은 세무사에 합격하여 개업했고 지금은 세무사로 나간 동기들(8명쯤 된다.) 중 가장 잘 나가는 세무사가 되었다.

형님은 내 마누라와 용산 세무서 시절 조사과에서 반장 반원으로 함께 있을 때 합격했고, 마누라 공부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형이다. 형님 부부는 명절마다 주변의 수십 명을 챙긴다. 사람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아름다운 부부다.

넷째는 열정녀였다.

막내 보다 한살 위였던 언니는 상대를 한 순간에 미혹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유달리 수려한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연애 전선이나 본인을 지켜 감싸주는 어떤 것들에만 매우 깊이 천착하는 이기적인 동생이었다. 우리 200명이 넘는 전체 동기 중에 가장 먼저 세무사를 따서 나갔고 지금은 잘 나간다.


횟집에 모인 우리.

나는 결정했다. 마시기로. 113일간의 금주를 깨고 한 번 마신 후 11일을 다시 금주했었는데 어제는 그냥 마셔야 하는 날이었다. 대구에서 부담 보이가 5년 만에 올라온 20주년. 우리는 첫 잔을 부딪히며 너나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지방직 나부랭이로 넘어온지 13년 째인 나는 감회로웠다.

2005년 국세청 9급 공채에 합격하여 77년생 동기 회장도 하고 국세청 화류계의 정점에 섰던 나는 2007년 김포시청으로 교류해 넘어 갔다가, 2009년 7급 공채에 합격하여 국세청에 다시 들어간 나는 2011년 마누라를 만났고, 2013년 다시 서울시청으로 교류해 넘어갔고, 2014년 서대문구청으로 최종적으로 교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착의 습벽을 혐오하는, 구청 생활이 재미 없어진지 오래인 나는 언제나 먼 곳을 그리워하고 있지만 다시 국세청으로 넘어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은 나의 음주에 즐거워했다. 평소에도 똘아이인데 술이 들어가면 나는 상똘아이로 변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거침 없는 놈이 알코올을 덧대면 그저 반마리 개가 되기 때문이다.

나의 별명은 '번개탄'이기 때문에 앞자리에 동석한 마누라가 속도 조절을 하라고 계속 말했다. 그러나 나는 또 그렇게 소실 되어 갔다.

대구에서 무인 독서실 3개를 운영하던(제수씨 명의로) '부담 보이'는 경기 한파로(전기세의 급증) 1개로 줄였으며, 농막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그 울분과 회한을 삭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의 방황으로 온갖 송사를 다 겪은 이야기도 했다. 나는 무럭무럭 취해 갈 수 밖에 없었다.

일산에 놀러간 사무실 잡도리들한테 단톡방을 만들어 술 마시는 나의 작태를 알렸다.

6색의 육두문자들이 날라왔다. 국세 새끼들하고 먹을때만 술을 마시냐는 둥, 배신자의 최후는 그저 또 멍멍이일꺼라는 둥. 넘어오라는 둥.

일단 오케이. 그냥 오케이.


마누라가 우리 동기들 축하해 준다며 이쁜 케이크까지 준비해왔다. 근데 초를 20개 사왔다. 마누라 답지 않다. 극J 마누라 답지 않았다. 활활 우리를 태워줄 심산이었으리라.

닌텐도를 하던 딸내미도 케이크 타임에는 같이 박수를 쳐줬다. 가르친대로 넙죽 인사하여 5만원도 획득했다. 청출어람이다.

대구 놈을 빼고 가까이 사는 우리는 더 자주 보자고 했다.


'떠남'과 '돌아옴'이란 서로 꼬리를 물고 순환의 고리를 이루는 것이고 그것은 인생의 영원한 주제이다. 우리는 매 순간 내 마음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타인으로부터, 관계로부터 그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이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히 길항하며 시간과 공간의 표상을 넘나드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하늘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가끔 이렇게 정다울 일이다.


만남은 닻이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하는데 각자의 벼랑을 디디며 버티고 사는 우리들.

'있음의 없음'과 '없음의 있음'을 나누기 위해 그렇게, 그래도, 그래서 만나야 한다. 다정해야한다.

바람에 흩어져간 추억의 씨앗들을 우연히, 때로는 필연히 줏어야 한다. 그렇게 줏어야 잘 죽을 수 있다.


내가 만취하여 대구 놈이 우리 집에서 자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큰 형님 집으로 갔다.

지금의 날숨들에서 베어나오는 이 현묘한 숙취가 12일 전과 달리 즐거운 지금이다.

무늬가 남은 숙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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