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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일기 1.(- 딸의 탄생 -)

2015.6.2.

by 하니오웰


시작은 점이었다.


이 기록들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24년 12월 20일의 금주 도전의 시작'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딸에게 '나와 너 주변의 것들에 대한 소소한 역사'를 책으로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매일 금주 일기를 쓰려다 보니 점차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며 진작 이 번거로움을 시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깊다.


온전한 나를 간추려 만나게 하는 기록의 힘을 더 일찍 깨달았어야 하는데. 어설프더라도 이렇게 참 좋은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딸에 대한 기록도 시작해 보려 한다.


이제는 꽤 커버린 딸의 지난한 과정들을 일일이 쓸 생각은 없다.

일어났던 몇 가지 편린들은 쓰겠고, 앞으로 펼쳐질 '좀 더 세밀해질 감정선의 대결'의 인과의 시종을 차곡차곡 쌓아보고 싶다.


나는 2013년 11월 2일 결혼했다.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으나 마늘은 다복을 원했다.

절충이 있었고 서로의 응시에 정교한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헤아리고 서둘렀다.


우리의 조급함은 그 덩치를 불려갔고 집안 곳곳에 우울이 암약하기 시작할 무렵.

친한 언니와 진하게 마시고 온 마늘이 몸이 좀 이상하다고 했고 결과는 두 줄이었다.


임신 7개월쯤 불광천 산책을 하다가 마늘은 발을 헛디뎌 경사길에서 좀 굴렀는데, 설마 했던 내가 좀 웃었나 보다. 나는 그것을 해맑음이라 느꼈는데 기가 찬 '자승자박'이었고, 내가 맞은 것은 머리였는데 가슴이 아팠던 순간이며 지금도 마늘에게 가끔씩 올라오는 두드러기가 되었다.


2015년 6월 2일 오후 4시 경 핸드폰이 울렸다. "양수가 터진 것 같아."

나는 '은혜 산부인과'로 향했다.

진통은 3시간 넘게 계속 되었다.

서재응이 니퍼트를 한창 바르던 순간이었다. 다급히 문을 열고 나온 간호사가 기가 차서 "남편 분. 좀 너무 하시네요. 들어가셔도 됩니다. 출산 하셨어요."

7시 48분. 3.36k에 53cm였다.

특유의 어리버리함을 담아 뚝딱거렸고 못 생긴 큰 손으로 탯줄을 잘랐다. 아기를 보는데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어쩜 이렇게 작고 이쁘지? "라는 경이로움을 표했지만 그 뿐이었고. 이후 100일 정도는 '완벽한 추상의 피사체' 정도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의사가 내내 안심 시켰지만 임신 내내 걱정했던 '아이의 장애 여부'를 확인하고 안도하던 즈음. 회복실에서 가까이 아기 눈을 보신 엄마는 "세상에 이런 예쁜 눈은 없다" 하시더니 "민우야, 1층 삼겹살집으로 와라. 3인분 주문해 놨다."

나는 그 순간에 또 '자승자박' 했다. 배불리 먹고 왔고 '결자해지'의 길은 없었다. 혼자 두고 온 마늘에 대한 걱정은 있었을지언정 미안함까지는 내게 무리였을까? 사건은 뚜렷한데 감정의 종류가 생각 나지 않는다.

몰고 온 고기 냄새를 마늘이 매우 역해 했던 기억이 있다.


이름은 '하은'으로 하기로 했다. 독실한 마늘 덕에 훗 날 숱하게 '하느님의 은혜'라는 뜻이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지만 클 하(嘏), 은헤로울 은(恩)이다.

그리고 현시점 기준 광산 김 씨 대를 잇는 유일한 후손인데 딸이 분명하다.


딸의 태명은 '라미'였다. 모나지 않고 동그랗고 원만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였다. 녹번동의 '동그라미 산후 조리원'으로 옮겼고 '메르스'가 창궐하던 때라 시부모, 친정 부모 모두 면회가 불가했다. 남편도 방문 자제를 부탁하던 시절임에 감사해 하며 집에서 널부러져 야구를 즐겁게 봤던 기억이 난다.

짐을 싸들고 가끔 찾아가 들여다 볼 때마다 따님은 자고 있었다. '아빠로 다시 태어날 나'를 조금 더 기다려 주는 것이었으리라.

조리원 2주를 마치고 마늘은 장모님 댁으로 들어갔다.


2015년 6월 2일. 이모와의 카톡을 찾았다.



2015년 6월 7일 딸 사진 옆에 끄적여 놨던 나의 기록도 찾았다. '너는 나의 모든 것 중 단 하나'


https://blog.naver.com/hanipapa_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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