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이 걷힌 밤, 새벽

by 하니오웰

엊저녁 퇴근 직전, 마누라에게 급한 약속이 생겼다는 연락이 왔다.

잘 풀리면 단발성 용역 수임 건이 생길지도 몰라, 가봐야 한단다.

요즘 부쩍 의기소침해져 있는 마누라에게 좋은 결과가 이어지기를 바랐다.

익숙한 용두사미의 선례가 많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도 일정이 있어, 딸의 저녁을 배달로 해결해야 했다.

아이가 수학 학원과 수영 학원을 연달아 다녀오는 날이라, 귀가할 즈음엔 가장 배고픈 요일이었다.

문자에 답이 왔다.

'아빠, 이따 응급실 떡볶이 시켜줘. 치즈 추가, 맛은 그냥 순한 맛.'


나의 일정은 불쾌함을 남겼고, 마음 한편이 일렁였다.

집에 와보니 딸이 아직 안 먹고 있었다.

"왜 먼저 안 먹었어?"

"아빠랑, 같이 먹을라고"

"아빠는 먹고 왔어"

스퀴시 유튜브 영상을 틀며 아이는 그제야 포장을 뜯는다. 아이 옆에 앉는다.

떡볶이 3분의 1 정도가 남았다.

"남은 거 내일 먹을 수 있니?"

"아니"

마누라한테 안 걸리게 몇 겹으로 묶어 냉동실에 넣는다.

나중에 몰래 버려야 한다.

숙제 시간.

아이는 플라톤 책부터 읽는다.

나는 속이 시끄러울 때 잠깐씩 펼쳐보는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을 든다.

잠깐 읽던 아이가 말한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아이가 읽던 책을 나는 집어 든다.

"아빠가 읽어줄게."

웬걸. 이번 주 플라톤 책이 박완서 작가의 단편이었다.

"하니야, 정말 신기하다. 이 분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야"

숙제로 읽는 아이는 심드렁하다.

들여다보니 문장이 춤을 춘다. 아이 수준을 훌쩍 넘는다.


"아빠 읽어줘, 시간이 없어서 영어 숙제하면서 들을게"

"하니야, 둘 중 하나에 집중하는 거지. 영어 숙제를 하는 너 옆에서 읽어달라는 게 말이 되니?"

"말이 돼!"

"둘 중 하나만 하자"

"말이 되는 거라니까?"

참을 인을 삼킨다. 감사 일기 한 줄을 위해 참는다.

읽어 주기 시작하니 영어 숙제를 하면서도, 내가 읽어주는 문장들을 곱씹고 맥락까지 짚어낸다.

나랑 달리 멀티가 된다. 서너 페이지를 더 읽어준다.

"아빠 이제 그만, 여기는 집중해야 돼"

영어 작문 숙제로 넘어가자, 나를 제지한다.

그다음 수학.

어제 나의 방파제를 무너트린 과목.

"아빠 플라톤 책 다시 읽어줘"

신기한 친구다.

한 문제를 끙끙 거리더니 문제집을 덮는다.

"아빠 자자. 대신 이야기 십 분만 하다 자자"

사무실 승진 후일담, 윈터와 정국 이야기, 장카설 중 누가 제일 이쁜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든다.

잠들기 직전 아이의 말.

"아빠, 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 엄마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참은 보람이 있다.

잔소리를 참은 덕에, 아이와 일주일 만에 침대에서 말랑한 잡담을 나눌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잠시 그대로 누워 두 번째 마음을 고르고 폈다.

아이를 재우고 나와 넷플릭스를 켰다.

새로 보기 시작한 '프로보노' 드라마를 십여 분 보다가 자러 들어간다.

처음 깨니 새벽 한시 반, 아이쉐어링을 켜니 마누라는 아직 종각이다.

'들어오겠지'

다시 깨니 세시 사십 분, 옆에 마누라가 없다.

아이쉐어링을 다시 켜니 마누라가 아직 종각이다.

전화를 거니 받지 않는다.

카톡이 오기 시작한다.

'나 이제 들어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항상 미안하고 고마워. 나는 계속 살아갈 거고 하나님 외 너랑 하니만 사랑해'

일이 잘 안되었음을 예감한다. 짠함이 몰려온다.

'조심히 와. 건강해야 돼. 나도 사랑해'

'응 미안해'

'이 모든 것이 지나가리라. 오빠가 내년에 마음 좀 편해지면 영업 좀 해볼게'

'아녀'

소파에서 마누라를 기다린다.

잘 준비를 마친 마누라가 내 무릎에 고개를 포개고 들썩인다.

토닥여준다.

"들어가자. 오빠가 재워줄게"

방에 들어가 안아주자마자, 이내 코를 곤다.

마누라가 무사히 귀가한 것에 감사하다.

세 번째 각성이 회수되었다.

참 많은 마음이 들고난 밤과 새벽이다.

다르게 살겠다.

부유한 거품들부터 걷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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