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는 악한 사람을 만나면 포기와 단념이 빠르다.
상대가 구사하는 친절하게 가식적인 다양한 잡기술에 데이거나 베이고 나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면서도 '뒷담화'나 '욕지거리' 몇 마디 날리고 판단과 평가를 빠르게 마쳐버리곤 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말을 던지며 당당하고 비겁한 정신 승리를 쟁취하고 피해 버린다.
그것은 내가 악하거나 착해서가 아니고, 부딪히면 싸워야 하고 싸우면 기가 빨리고 기가 빨리면 피곤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들의 '짓'을 당해도 우리가 주로 참는 이유이고 어쩌면 그 '선택적 인내' 때문에 '악'이 더 횡행하고 제 덩치를 쉽게 불려 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착한 사람을 만나면 인정과 납득이 오래 걸린다.
상대의 그 담백하고 진솔한 대가 없는 언행들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고마워하지 않는다.
긴 호흡으로 이유와 의도를 의심하고 마음 속에서 자기 안의 '판관'을 끌어 올려 재단하고 발골하여 역사의 주인이신 그 분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거지?' 라는 말을 뇌까리며 고고하고 신속하게 무책임한 비관론에 빠져들어간다.
순수한 착한 의도를 귀찮은 각오나 단계적 계산에 의한 술수나 수작으로 곡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선'이 활개를 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인간은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수단은 보통 악한 '선의'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위선보다 위악이 낫다'고 생각해 오고 있다. 그러나 다정함과 연민에 약하고 악한 '선의'를 갈급하는 나는 착한 사람들을 만나면 쉽게 설렌다.
착하게 사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상냥하고 온유한 마음씨만 가지고 착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악에 받친 무시무시한 싸움을 계속 해야 그 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의 근처를 기웃거리면서 동시에 착하게 산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내가 인생에서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착한 사람은 2005년 세무서 첫 발령 동기로 만난 한 살 위 형님이다.
그 무렵 나는 일 주일에 서너 번씩 술자리가 있었는데 주로 세무서 입사 동기들과 함께였다. 그 형님과는 같은 세무서로 발령까지 받았으니 '함께'의 빈도는 더 많았다.
적게 잡아도 한 달에 열번, 일년에 120번, 2년 반을 함께 했으니 300번은 같이 취했을 것이다.
나는 열 번 중 절반은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부어대는 사람이었으며 안 그래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이 술이 되면 얼마나 더 무겁게 흐트러졌을까?
그 형님은 홍제동 세무서 앞에서 자취를 했었다. 인사불성이 된 나를 매 번 택시에 태워 주었고 함께 택시를 타 갈현동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부지기수다.
내 모친에 죄송해서 문앞에 나를 두고 초인종을 누르고 숨어서 지켜보다가 도망간 적이 많다고 한다.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데...
형님은 그 숱함 속에서 단 한 번 화낸 적도, 찌푸린 적도 없다.
교육원 때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그 형은 조용한 스타일이고 나는 여기저기 종횡무진 나대고 취해 다니던 '미친개'였다. 그 형님은 광주팀 나는 서울팀. 어울리는 무리가 달랐다.
그런데 같은 세무서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는 그 형님도 거하게 취해 방으로 돌아갈 때가 많았는데 나란 놈이 몇 명에게 떠받쳐 들려 방으로 실려가는 것을 자주 봤고 저 놈이 정말 '탑 오브 탑 쓰레기'라고 여겼다고 한다.
발령 2년 차 봄에 세무서 전체 직원이 북한산으로 산행을 가게 되었다.
형님은 총무과 업무지원팀 나는 징세과 체납정리팀이었으니 과도 팀도 달랐다.
형님은 업무지원팀이라 전체 일정의 계획과 진행 마무리를 책임지고 도맡아야 하는 업무 특성상 그런 날은 제일 바쁠 수 밖에 없다.
등산 초입길까지 형님은 나와 지원팀 일행 사이를 왔다갔다 뛰어 다니더니 산길이 조금 험해지자 아예 총무과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산행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구비구비 비틀거리는 나를 끌어 주고 부축해 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뒷풀이 회식 때 소주 한 잔 따라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 날 산행에서 '이 사람은 내가 평생 가야할 사람. 제일 고맙고 착한 사람'으로 깊이 새겼다.
재작년 가을. 오랜만에 서대문 발령 동기들 다섯 명이 다 모였다.
공덕동에서 아구 수육을 먹은 그 날 나는 용케 안 취해서 집으로 혼자 택시를 타고 와서 잠자리에 누웠는데 단톡방이 난리가 났다. 그 형님이 등촌동과 목동, 사당동을 차례로 택시 투어하여 동기들을 집 앞까지 일일이 내려주고 불광동 집으로 들어갔다는 동기들의 전언이었다.
그야말로 '왜 저렇게까지 해야만 하는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늘은 황당해 하며 이럴 때마다 '형수님이 얼마나 한숨을 쉬었을까?'라는 얘기를 했다.
그 날의 우발적인 일회성 처사가 아닐 것임은 미루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20여 년이 지나도 형님의 최량의 '선' 그 자체였다.
저번 주에 오랜만에 형님을 만났는데 술을 안 마시는 내 모습에 적잖이 놀라더니 2차에는 아예 내 옆에 앉아 내 손을 꼭 잡고 '어디가 아파서 그런거냐며, 잘 생각 했다며, 제수씨는 결국 잘 될 꺼라며, 딸래미도 이쁘게 잘 클 것이라며' 특유의 '선량 매크로'를 계속 돌렸다.
나는 언제인가부터 형님과 고민 상담은 하지 않는다.
2007년 재산세과에서 같이 근무할 때였다.
"야 이 개새끼야. 들어와서 맞장 떠! 맞장 뜨자!" 큰 목소리가 났다.
그런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 될리 없는, 메인 '악역 주연'은 될 수가 없는 '듣보잡 단역' 형님의 빳빳한 기립 자세에 직원들은 자지러졌다.
경찰이 출동했고 바로 암행 감찰이 떴다.
형님의 미담과 평소 착한 행실에 대한 주변 직원들의 일관된 진술이 이어졌고 직원의 비위와 동태나 평판에 대해 기가 막힌 정보력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 국세청 감찰 직원은 잘 알고 있었고, 잘 알았다며 돌아갔다.
8급 나부랭이까지 파악하고 있는 그 치밀한 사찰력에 놀란 것에 대한 얘기는 차치한다.
결혼을 아쉬워 한 동기들에게 '나도 남자여'를 외치고 떠나간. 동기들 모여 회식할 때마다 취하면 맥락 없이 '찌끌자'를 외치며 박차고 일어나던. 얼굴은 해사하고 인품이 좋아 인기가 참 많았던 형님.
그 형님과 친한 것이 나는 언제나 자랑이었다.
나는 그 이후 수 백 명의 '차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형님과 비교해 보는 나쁜 버릇이 생겼다.
계절이 자신의 옷을 바꿔 입을 수 있을 때까지, 계절의 바뀜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할 그 날들까지 나는 힘을 다해 그 형님을 만날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