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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와 은유, 질문 (1)

최진석 교수의 시선 - 2

by 김박사

2018.02. 21.

최진석 건명원 원장님의 시선을, 나의 것으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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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와 은유, 질문


01 탁월한 시선, 전략적 눈높이의 중요성


'전략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탁월함'이란 '전략적'이라는 의미이다.


1) 전략적이란, 판을 짜는 행위를 말한다.


정해진 힘의 균형 안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힘의 균형 자체를 달리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전술적이란, 이미 짜여진 판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태에 대응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전술적이란, “따라하기” 수준이다


우리는 현재 따라 하는 전술적 레벨에서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해 있다.

익숙한 방식으로 하던 대로 하는 것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중진국은 전술적 차원에서 움직인다.

우리나라에는 국가 단위 전략 문제 연구소가 없다.

아직 전략적 높이의 국가 운영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제는 하던 일만 계속할 수밖에 없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바보라고 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바보’란 타인에 의해 유린당하는 사람을 말한다.

시선을 전략적 높이로 가져가야 한다.


'탁월한 시선'을 가져야 한다.


탁월한 시선을 어떻게 사용할까.


아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는 것이 핵심이다.

광고의 문구를 빌어 오자면, Just Do it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 않은 것’ 이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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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시선을 삶 속에 적용해야 한다.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장 높은 단계에서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탁월한 삶,
전략적 삶,
예술적 삶,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술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예술적 그림을 말할 때 반 고흐의 그림을 예로 든다.

왜 그의 작품을 예술적이라 하는가?


WHY : 사람을 ‘압도하는 힘’ 이 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보는 이의 평정이 흔들리고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이 불안한 느낌을 ‘감동’이라고 한다.


‘감동’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은 ‘의외성’이다.

본 적이 없는 재료, 표현, 기법이 바로 ‘의외성’이다.


02 전략의 핵심


전략의 핵심은,

적을 ‘의외의 패턴’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모든 세상의 위대하고 탁월한 것은

‘의외의 것’에서 시작한다.


‘의외성’이다.

본 듯한 것, 들어본 것은 예술이 아니다.


의외성이란,

집단이 공유하는 지식, 언어를 벗어나,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을 ‘창의’라고 한다.

창의적인 것이 판을 바꾼다.


이것이 ‘고유함’이다.


‘고유함이 ‘창의’를 만들고,

‘창의’가 ‘감동’을 만들며,

‘감동’을 주는 것이 곧 ‘탁월함’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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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가 죽기 전까지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는가.

완성하지 않고 죽을 수 없는 나만의 비밀은 무엇인가.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내 안의 어떤 것 때문인가.


결국, “내가 누구인가” 로귀결된다.

모든 철학, 종교의 마지막 챕터는 이것으로 귀결된다.


무엇을 가지고, 너를 ‘너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내가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세상에 무엇인가 변화를 바란다면,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자면 ‘정신분열상태’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삶을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는 힘 = 탁월한 삶이다.


탁월한 삶이란, 다음을 의미한다.


1. 자유롭고

2. 주체적이며

3. 독립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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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탁월한 삶 = 새로운 ‘돌파’를 꿈꾸는 삶이다.


새로운 돌파를 꿈꾸지 않는다면,

고만고만한 봉우리만 넘나드는 삶이 된다.


이미 있는 언어와,

이미 있는 문법과,

이미 있는 체계 속에서 놀게 된다.


주어진 틀 안에서 남보다 ‘조금 나아지려’ 하는 것.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이렇게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남과 공유된 동일 시스템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잡담’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비교’와 ‘잡담’에 갇혀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이 상태’ 를벗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갇혀 있는 상태를 ‘안전’ 하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전술적 인간’의 모습이다.


[ 전술적 인간의 삶 ]

‘다음’을 추구하지 않는다.
‘도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안전’을 추구한다.


이미 있는 틀에 갇힌 상태에서,

기존의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뱉어내는 것.


이것을 ‘대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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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의 승부는,

누가 ‘지식’과 ‘이론’을 ‘기존에 있던 대로’

빨리 뱉어내는가가 된다.


즉, ‘과거’에 얽매이게 된다.


‘대답’에 익숙한 인재 위주의 사회는 늘 과거 논쟁에 치우친다

몇십 년 동안 우리 사회의 행태는 ‘과거’를 따지는 일이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사회는,

과거를 따져야 진실된 삶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대답에 길들여진 인재를 양산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는 다음과 같은 논쟁에 휘말린다.


선악 논쟁 : 선이냐 악이냐
진위 논쟁 : 참이냐 거짓이냐
과거 논쟁 : 알고 있냐 모르고 있냐


이러한 사회는 다양한 프레임을 무시한다.


크냐 작냐, 활동적이냐 아니냐와 같은

다양한 시선을 무시한다.


따라서 쉽게 자체의 ‘윤리적’ 판단에 빠지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


강조하지만,


‘대답’은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을

그대로 꺼내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04 대답과 질문


인간은 감각적, 동물적, 경험적 존재이다.


‘윤리’라는 것은 이러한 한계를

한 차원 뛰어넘는 높은 기준이어야 한다.


‘대답’ 중시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윤리가 진정한 ‘윤리’가 아니라,

‘신념’으로 굳어져 버린다.


내가 믿는 것이 곧 절대적 잣대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질문 : 전쟁은 나쁜 것인가?

한국 학생 : 전쟁은 나빠요. 안돼요.


같은 질문에 대해, 일본, 미국의 학생들은 이렇게 답한다.


질문 : 전쟁은 나쁜 것인가?

일본, 미국 학생 : 전쟁에서 주도권을 쥐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같은 질문에도 한국의 경우에는

‘기준을 정해두고’ 시작해버린다.


즉, ‘갇혀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기준을 정해 두고, 지키는 것이다.

이것을 ‘윤리’라고 믿고 있다.


반면, 일본과 미국의 학생은 ‘대답’이 아닌 ‘질문’을 한다.


‘질문’을 하면, 지식의 폭이 달라진다.


실제로 ‘윤리’란, ‘선악’을 ‘지배’하는 높은 차원의 기준이다.

새로운 선악의 ‘개념을 창조’하는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윤리’이다.


이미 있는 지식을 그대로 뱉어내는 것은,

나는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 지나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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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가 ‘자기 자신’이 아님을 의미한다.


내가 남의 ‘지식’과 ‘이론’을

이행하고 뱉어내는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즉,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05 종속적 주체와 독립적 주체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창의적인 존재.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독립적 주체이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은 상태를,

‘종속적 주체’라고 한다.


‘지식’과 ‘이론’을 ‘대행’하는 사람.

남이 만든 것을 그대로 이용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은 ‘지식 생산국’이 아니다.

주도권이 외부에 있다.


우리나라의 지금 자존감 상태는 낮다.


더 좋은 것, 기준이 되는 것들은 모두

‘외부’에 있거나, 가져온 것이다.


몸담은 대학에서 도서관장 제의를 받고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좋은 기획을 제안하고자 하면 늘 벽에 부딪혔다.


두 가지 장벽이 있는데, 늘 이것이었다.


“선례가 있습니까?”
“형평성에 맞지 않습니다.”


‘선례’‘형평성’이다.


이것만 따지다가 늙어 죽을 판이다.


선례와 형평성을 따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이런 의미이다.


“정해진 것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


선례란,

누군가 만든 것이다.


따른다는 것은,

타인이 정한 것 그대로 한다는 것이다.


내가 몸 담은 대학은

남이 만든 기준만 따르는 평이한 대학이 되었다.

현재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삼성이 ‘타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삼성은 ‘삼성’이 아니다.


구글이 ‘타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순간,

구글은 ‘구글’이 아니다.


06 ‘돌파’하고 ‘창의적’이 되어라


질문하라.


이 세계에 나로부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이것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인간은 ‘질문’할 때에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이 세상의 모든 위대함, 창의적인 것들은

100% ‘질문의 결과’이다.

결코 ‘대답의 결과’가 아니다.


‘독립적 주체’,

즉, 자기가 자기로서 존재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질문’이다.


자신을 구할 때 질문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만

앞으로 ‘돌파’할 수 있다.




다음 글에 계속...




김박사


귀여운 딸 하나를 둔 평범한 아빠.

평균 대한민국 직장인.

마케팅과 세일즈, Business innovation,

그리고 지금은 인재개발 업무를 하고 있다.


전국 1300명의 직원들에게 매주 한 번씩 뉴스레터를 보내기도 하고,

이야기 잘 안 들어주는 영업 직원들에게 가끔 손편지를 보내거나,

의사 가운을 입고 자칭 ‘세일즈 박사’가 되어 오늘도 뛴다.


세일즈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쓰고, 떠든다.

잘 팔리는 인간의 공통점을 연구한다.


판매하는 상품은, 세일즈에 대한 이야기.

인생이 곧 세일즈, 세일즈가 곧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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